산정현교회의 믿음의 사람들

 

오윤선 장로
산정현교회 장로이면서 육영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오윤선(1878-1950)은 산정현교회가 자랑하는 장로였다. 그는 1918년 산정현교회 집사로 임명받았고, 4년 후인 1922년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195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오윤선은 평남 대동군 고평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한학에 능통했으며, 숭인, 숭덕, 숭현학교 운영에 전념했다. 이 학교들은 평양지역 장대현교회, 남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서문외교회, 연화동교회, 명촌교회, 산정현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는 학교로 전체 실무를 오윤선이 맡았다. 오윤선은 1923년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숭덕학교에서 분립하여 숭인상업학교를 설립할 때 설립자로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물산장려운동, 백선행기념관사업, 인정도서관사업, 평남건국준비조직에 이르기까지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있어서 늘 조만식, 김동원과 뜻을 같이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산정현교회를 복구할 때 오윤선은 조만식과 같이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다. 8월 17일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모임 장소는 오윤선 장로의 집이었다.
오윤선은 해방 후 김일성 공산정권 하에서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청산하는 일보다 노회와 총회가 단합하여 정치적인 힘을 결집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원하였다. 자연히 그는 산정현교회의 평양노회 가입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같은 이유로 1948년 2월 11일 산정현교회 분열 과정 중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유계준 장로
조만식, 오윤선과 더불어 산정현교회 장로로 널리 알려진 유계준(1879-1950)은 산정현교회와 함께 고난과 영광을 같이한 인물이다. 그는 1879년 4월 3일 평남 안주군 신안주면 청산오리에서 유석덕과 안동금 사이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평양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한 유계준은 사무엘 마펫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그 후 기독교에 헌신하여 자신의 집에서 미림(美林)교회를 설립하고, 평양숭덕학교 재단이사장, 양로원 설립 등 사회사업과 기독교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념하여 이 분야에 큰 공적을 남겼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유계준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독립투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거나 자금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평남 일원에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고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모금하는 일에 앞장섰다. 일제 말엽 창씨개명을 강요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였고,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산정현교회가 감당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계준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산정현교회가 복구될 때 조만식, 오윤선과 함께 산정현교회가 평양노회에 가입하는 일에 적극 찬성하기도 하였다. 1948년 2월 11일 교회가 분열될 때 그는 조만식과 오윤선의 민족주의 성향 쪽에 합류했다.
유계준은 공산당의 탄압이 점점 가혹해지자 부인과 슬하의 8남매를 월남시키고 자신은 평양에 남아 산정현교회를 지켰다. 그는 공산당의 위협과 탄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1950년 4월 공산정권이 산정현교회 건물을 적산 가옥이라고 접수하자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 예배가 중단되지 않도록 도왔다. 그는 전쟁 바로 직전인 1950년 6월 24일 공산정권의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9월 28일 수복 이후 패주하는 공산군에 의해 참살되어 순교했다.

 
김동원 장로
1913년 장로로 장립받은 김동원 장로는 산정현교회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전택부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일생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하여 일제와 싸웠으며, 또한 올바른 사회윤리의식을 가지고 경제적인 능력을 교육과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남다른 신앙의 양심에서 기인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양 대부호 김대윤(金大潤)의 장남이었던 김동원(1884-1950)은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의 형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조만식과 함께 한학을 배우고 일본에 유학 도쿄 세이소꾸(正則) 예배학교 중학부를 거쳐 동경 법정대학을 졸업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는 귀국 후 신민회에 가담하면서 안창호, 조만식과 함께 대성학교를 설립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지도자 양성에 헌신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언도받기도 한 김동원은 출옥 후 민족운동과 민족산업진흥에 매진하였다. 그가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는 동안 산정현교회는 평양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김동원은 숭덕학교, 숭현학교, 숭인학교 설립과 교장직, 숭실전문학교와 서울 세브란스의전 이사직을 맡으며 한국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20년 발기회 회장으로 평양의 YMCA 창설에 크게 공헌했으며,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평안도 책임을 맡고 항일단체인 청년학우회 총무로 섬기기도 했다. 그는 교육, 사회사업, 자선사업, 교계활동 등 전 분야에 있어서 1920년대 기독교 민족운동을 견인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었다:

3․1운동 당시에는 길선주 목사 등과 함께 평안남도지구 수뇌회의를 구성하여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해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내의 평양지구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밀송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국외의 안창호, 국내의 이승훈, 조만식 등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1920년 8월 24일에는 조만식을 총무로 하는 조선물산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거족적인 금주, 금연 및 물산장려운동으로까지 확산되게 했으며 신간회운동으로 연결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업에 투신하여 평안고무, 평안섬유, 태안양행, 평안농사주식회사 등 기업을 경영하여 실업가로서도 괄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축적된 재산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위해 투자하였다.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 건축으로 어려울 때 김동원은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얼마나 적극 가담했는지는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산정현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당시 상당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둔 것처럼 김동원 역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거주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조만식과 함께 북한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서울로 내려와 군정청의 고문을 거쳐 한민당의 기획부장, 서북청년회의 명예회장, 한민당 총무직을 역임했고 제헌국회의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공산군에 납치되어 납북되었다가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1.2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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