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부흥운동의 저변 확대


1904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하디의 원산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평양과 서울과 다른 도시들에서도 부흥운동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1904년 10월 하디가 안식년을 앞두고 가진 서울, 평양, 제물포 부흥회는 영적 각성이 뚜렷이 감지되는 은혜로운 부흥회였다. 당시 영향력 있는 선교지(宣敎誌) 코리아 메소디스트(The Korea Methodist)가 보고한 대로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하디의 집회에“성령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집회 동안 교회에서 상당히 뛰어난 많은 사람들, 한국인 설교자, 전도부인, 성경반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이 영적 각성을 경험한 것이다. 이화학당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활동했던 페이니(Josephine Ophelia Payne)가 증언한 대로 “정동교회에서 하디 박사가 인도한 일련의 집회 동안 여학생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로운 부으심”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디의 서울, 평양, 제물포 부흥회


서울 집회에 이어 1904년 10월 16일부터 10일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시작된 하디의 평양 부흥회에서도 성령의 강권적인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무즈는 “주께서 권능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셨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디의 부흥회의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였다:


설교자 몇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우리 선교회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지은 죄들을 회개했다. 그들 자신들과 상당한 갈등을 한 후 그들은 공개집회에서 일어나 분명한 태도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몇몇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자세로 자신들의 가족들을 대하지 않았음을 회개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를 미워했음을,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빚을 갚지 않았음을 회개하였고, 그리고 그 외 모든 사람들이 다른 수많은 죄목들을 비롯한 특별한 죄들을 무엇이나 다 깊이 회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심령을 사로잡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로 심하게 울부짖었다. 나는 이 부흥회 동안 내가 목격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강하게 회개하는 백성들을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는 마지막 말은 하디의 부흥회에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는가를 보여 준다. 1905년 6월 모리스가 진술한 대로 이보다“더 깊은 죄에 대한 각성을 본 적이 없으며”, 집회 후 평양의 교회는 여러 방향에서“영구적인 축복을 받았다.”

 

서울과 평양에 부흥의 불길을 가지고 간 하디가 다시 성령의 불을 가지고 간 곳은 인천 제물포였다. 11월 1일부터 일주일 간 가진 하디의 인천 제물포 집회에서도 집회 기간 동안 “100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케이블(E. M. Cable)이 “또 다른 놀라운 부흥”이라고 불렀던 그 성령의 역사가 바로 그 집회였다. 그 현장에 있었던 케이블은 결코 전에는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며 이렇게 보고하였다:


말씀 선포에는 성령의 대단한 능력과 증거가 나타났으며, 무시무시한 죄성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의 능력이 나타났다. 설교가 계속되면서 죄의 통회가 너무도 강해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일어나는 바람에 심지어 하디 박사의 집회 인도가 방해받았다. 나는 결코 전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하나둘씩 일어나 그가 혹은 그녀가 행한 모든 죄악된 것들을 낱낱이 열거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착했던 한 여인이 일어나 그녀가 계속해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거의 1년이 넘도록 함께 동거했다고 고백했다. 그 남자 또한 이 여인과 함께 동거했음을 고백하였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부흥회가 끝나고 그 둘이 결혼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들의 죄를 숨길 수 없었다. 심령 깊은 곳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던 나만의 죄악들이 성령의 빛이 비추이자 적나라하게 드러나 통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여인이 부흥회를 통해 서로 화해했고, 수년 동안 교회에 다니고 있던 한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거짓과 도적질을 회개했으며 심지어 간음죄도 저질렀다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어느 한 사람의 참된 죄의 고백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자신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부흥회는 수일 동안 계속되어 그 교회의 거의 100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주님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깊고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았다. 부흥집회 이후 그들의 삶이 얼마나 행복과 능력으로 충만했는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죄를 확신시키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현시(demonstration)를 증거하기 위해 선교지 한국에 오는 것은 값진 일이다. 이 자비로운 은혜의 역사는 주로 교회 내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영향은 선교구 전체에 광범위하게 감지되었다.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이들은 세상으로 나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전체 사역에서 일어날 대부흥운동의 시작일 뿐이라고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


하디의 제물포 집회가 가져다 준 결과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말해 준다. 이처럼 서울과 평양과 개성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집회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어 점점 더 주변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1905년에 접어들면서 하디가 안식년으로 출국한 뒤에도 여전히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특히 남감리교 선교구 개성에서 죄로부터의 각성이 뚜렷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1905년에 들어서 뚜렷한 영적 각성이 감지된 곳은 개성만이 아니었다. 케이블(E. M. Cable)이 보고한 것처럼“고도(古都) 강화에서도 마른 뼈 가운데 놀라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1905년 2월 말, 강화 홍해교회에서 열린 여자 사경회 기간 중 밀러(L. A. Miller)가 인도하는 아침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의 은혜를 깨달은 여자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로 자신들의 나태한 신앙을 통회하고 죄사함을 경험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처럼 1903년 8월 하디로 촉발된 원산부흥운동은 1904년 하디를 통해 개성과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확대되다 1905년에 접어들면서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과 전도부인을 비롯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동참하는 하나의 각성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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