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 04일/서재필 추방  

 

기독교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요, 민권운동가요, 교육가요, 의료인이요, 그리고 기독교 청년지도자였던 송제 서재필의 생애는 그의 경력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지도자들과 함께 거사한 갑신혁명의 실패, 그로 인한 일본으로의 망명, 부모의 음독자살, 부인의 자살, 그리고 두 살 된 아들이 굶어죽는 일련의 쓰라린 사건을 경험해야 했다.

다시 미국에 건너가 기독교 신앙을 접하고 10년 후 명문 워싱턴대학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송제는 이듬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윤치호, 민영환, 이상재, 이채연, 유길준, 박정양 등과 민중의 계몽운동을 착수했다. 한편으로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거족적 민족계몽을 목표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문으로 국내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은 서재필의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전형적인 사례였다. 독립신문은 곧 독립협회 결성으로 이어져 비폭력에 의한 정치개혁, 언론, 집회, 출판, 계몽을 통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 민권운동을 전개하던 서재필은 1898년 5월 13일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다시 떠나야 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미국에 간 후에도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꺼질 줄 몰랐다. 1919년의 3.1운동의 정당성과 을사보호조약, 통감정치, 한일합방, 105인 사건의 불법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전 세계 여론에 폭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 장군의 말대로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과 번영에 전 생애를 투신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0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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