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의 신학적 변천과 장감의 갈등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는 양주삼을 통해 감리교단이, 자유주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정경옥을 통해 협성신학교가, 그리고 신비주의 부흥운동으로 직통계시를 긍정한 이용도를 통해 한국감리교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 놀라운 신학적 변천을 맞았다. 과거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로교와 나란히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던 한국감리교회가 신학적 변천을 맞으면서 자연히 교세가 침체하는 국면을 맞은 것이다. 1935년 10월 신앙생활에서 김인서는 감리교의 교세 침체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기고했다:

一. 예언(禮[豫]言)
감리교(監理敎)는 요한 웨슬네 선생(先生)의 창립이래(創立以來) 이세기말만(二世紀末滿)에 사천만교도(四千萬敎徒)를 옹(擁)하야 장로(長老), 감리(監理), 조합(組合), 침례(浸禮) 등(等) 세계4대교파(世界四大敎派) 중(中) 제2위(第二位)를 점(点)하고 잇서 미국(米國)갓흔 나라에서는 제일(第一) 큰 교파(敎派)요 조선(朝鮮)에서도 적지 안은 교파(敎派)이다. 그런데 近年(근년) 조선감리교(朝鮮監理敎)는 남북감리교연합(南北監理敎聯合) 후(後)에 진흥(振興)을 기대(企待)하엿드니 도로혀 감퇴(減退)함을 보이고 잇슴은 천만유감(千萬遺憾)으로 근심하야 마지아니한다. 정신(精神)은 비록 교파관념(敎派觀念)을 낫다 할지라도 교적(敎籍)을 타교파(他敎派)에 둔 여배(余輩)-감리교(監理敎) 일을 말함은 조심(操心)할 일이나 남국(南國)유대의 선지(先知)가 북국(北國)이스라엘의 일을 예언(豫言)할 수 이서스니 여배(余輩)도 교파적(敎派的) 소절(小節)을 버서바리고 감(敢)히 일언(一言)이 잇고저 한다.

二. 망양(亡羊)의 혈(血)
一九三O年 남북감리회합동(南北監理會合同) 후(後) 통계숫자(統計數字)는 아직 정리도상(整理途上)에 잇서 정확(精確)치 못하여 보이나 최근(最近) 一九三四年 말일(末日) 조사(調査)는 실수(實數)에 근(近)하리라고 밋는바 현대교인(現代敎人)이 6만 77인(六萬七十七人)이오 그 전년(前年) 곳 1933년도(一九三三年度) 6만 789인(六萬七百八十九人)에 비(比)기여 712인(七百十二人)이 감소(減少)되엿다. 그 중(中)에도 장년세례교인(長年洗禮敎人)이 433인(四百三十三人)이나 감소(減少)한 것은 놀날 일이다.
1934년도(一九三四年度)에 권서(勸書) 교사(敎師) 의사등(醫師等) 측면기관(側面機關)의 역원(役員)은 그만두고 순교역자(純敎役者)로마 선교사(宣敎師) 90인(九十人) 목사급(牧師及) 남녀전도사(男女傳道師) 843인(八百四十三人) 계(計) 933인(九百三十三人)의 일군이 일하엿고 경비(經費)로 말하면 교회연보(敎會捐補)가 34만 4천여원(三十四萬四千餘圓)을 썻고 선교비(宣敎費) 16만5천여원(十六萬五千餘圓)을 썻고 선교사(宣敎師)의 월급(月給)을 매인당(每人堂) 300원식계상(三百圓式計上)하면 연(年) 3십만원(三十萬圓)에 달(達)한다.
말하자면 작일년(昨一年)간 9백 교역자(九百敎役者)가 8십만원(八十萬圓)의 돈을 써가면서 7백명 교인(七百名敎人)을 주려노웟다.
불신자(不信者)를 인도(引導)하지 못하는 교회(敎會)를 주(主)서 오히려 죄(罪)업지 아니하다고 하야 에스결의게 그 피를 심문(審問)하시겟다고 전(傳)하엿거늘 망양7백명(亡羊七百名)의 피를 주(主)서 엇지 심문(審問)하시지 아니하겟는고.
구백교직일년사(九百敎職一年事)
대용소비백만금(大用小費百萬金)
오호망양칠백명(嗚呼亡羊七百命)
아주필혹심기혈(我主必惑審其血)

三. 교리적 결함(敎理的 缺陷)
교회(敎會)가 이러케 감퇴(減退)함에는 중대(重大)한 이유(理由)가 업지 못할지니 조선감리교부진(朝鮮監理敎不振)에 첫재 이유(理由)는 교리(敎理)의 불철저(不徹底)이니 이는 곳 신앙(信仰)의 불철저(不徹底)이다.
남북감리교연합교리적선언(南北監理敎聯合敎理的宣言)을 보면 기두(起頭)에 “기독교근본적원리(基督敎根本的原理)가 시대(時代)를 라……” 중단(中端)에 “아모 교리적(敎理的) 시험(試驗)을 강요(强要)치 아니한다.” 결말(結末)에 “개인신자(個人信者)의 충분(充分)한 신앙자유(信仰自由)를 시인(是認)한다.”고 선언(宣言)한 감리교교리적선언(監理敎敎理的宣言)을 읽고 대경(大驚)하지 안을 수 업다. 원리(原理)란 시대(時代)나 국경(國境)을 초월(超越)한다. “수학(數學)의 근본적(根本的) 원리(原理)가 시대(時代)를 라서”란 문구(文句)가 이슬 수 업는 것처럼 “기독교(基督敎)의 근본적(根本的) 원리(原理)가 시대(時代)를 라서”란 문구(文句)는 이슬 수 업다. 이는 상직(常識)에 버서나는 말이 아니면 기독교근본적원리(基督敎根本的原理)를 변(變)하랴는 말이다. 이우에 “교리적시험불요(敎理的試驗不要)”라면 엇던 교리(敎理)는 미더도 조코 아니 미더도 조흔가 이우에 “신앙자유(信仰自由)이면” 엇던 성경(聖經)은 미더도 조코 아니 미더도 조흔가 이 선언하(宣言下)에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 생활(生活), 성경(聖經), 교회(敎會), 사회(社會), 영생등(永生等) 8대교리(八大敎理)를 선언(宣言)하여스나 신앙자유하(信仰自由下)에 선포(宣布)된 교리(敎理)는 용(用)이적다. 그리고 처녀탄생(處女誕生), 십자가(十字架), 부활(復活), 재림(再臨) 등(等) 중대교의(重大敎義)에 언급(言及)치 아니하엿고 더구나 재림교의(再臨敎義)는 전전영자(全全影子)도 차즐 수 업다. 감리교선교사피도수목사(監理敎宣敎師皮道秀牧師)는 제5(第五) 성경조(聖經條)가 애매(曖昧)하다고 발표(發表)하엿거니와 여관(余觀) 감리교(監理敎) 교리적(敎理的) 선언급(宣言及) 교리(敎理)의 전문제조(全文諸條)가 용어급내용(用語及內容)이 미온불철저(微溫不徹底)하다.

四. 방향착오(方向差誤)
감리교부진(監理敎不振)의 둘재 이유(理由)는 사업(事業)으로 보아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방향착오(方向差誤)이다. 기독교교의(基督敎敎義)의 결국(結局)인 재림교의(再臨敎義)을 아버리고 그 대신(代身)에 “하나님의 이 실현(實現)된 인류사회(人類社會)가 천국(天國)임을 미드며 하나님 아버지 압헤서 모든 사람이 형제(兄弟)임을 미드며”라는 사회신조(社會信條)가 드러잇다. 예수 재림(再臨)하야 이적(異跡)으로 천국(天國)을 세운다는 것보다 현사회천국화(現社會天國化)의 사회신조(社會信條)는 가장 합리적(合理的)이오 가장 현대적(現代的)이오  성경(聖經)으로 설명(說明)된다. 그러나 현인류사회(現人類社會)를 천국화(天國化)하랴는 운동(運動)은 신지(神旨)보다 밥, 옷, 미(美)가 급선무(急先務)되여진다. 그래서 이 사회신조(社會信條)딧헤는 전도(傳道)보다 교육(敎育) 농촌(農村) 등등(等等)의 사업(事業)이 버려지게 되여 사회신조(社會信條)가 주(主)되고 모든 신조(信條)는 그것을 성취(成就)하기 위(爲)한 비복역((婢僕役)에 러진다.
보라. 작년감리회통계(昨年監理會統計)에 의(依)하면 예배당(禮拜堂)에 관(關)한 재산(財産)은 약2백만원(畧二百萬圓)을 계상(計上)할 수 잇고 청년회관등(靑年會館等)은 그만두고 학교(學校)와 병원(病院)에 관(關)한 재산(財産)만 약4백만원(畧四百萬圓)을 계상(計上)할 수 잇다. 2백만원(二百萬圓)으로 예배당(禮拜堂)을 짓고 4백만원(四百萬圓)으로 학교(學校)와 병원(病院)을 짓는 교회(敎會)의 방향(方向)이 엇지 되엿는가. 작년선교비(昨年宣敎費)가 16만원중(十六萬圓中) 기관사업비(機關事業費)가 11만6천여원(十一萬六千餘圓)이오 전도비(傳道費)는 겨우 3만8천9백원(三萬八千九百圓)이다. 그리면 8대신조중(八大信條中) 제7항(第七項) 사회신조(社會信條)를 위(爲)하야 11만원(十一萬圓)을 쓰고 기여7개신조(其餘七個信條)를 위(爲)하야 근근3만여원(僅僅三萬餘圓)을 쓰는 선교(宣敎)의 진정신(眞精神)이 어데 잇는가. 이 엇지 감리교선교방침(監理敎宣敎方針)이랴 장로교(長老敎)도 그러하다. “실물(實物)이 잇는 곳에 네 마음도 잇나니라”하신 성언(聖言)에 의(依)하여 보면 금일교회(今日敎會)의 정신(精神)이 사회신조(社會信條)가 주(主)요 복음신앙(福音信仰)은 그것을 위(爲)한 종(從)이 되어 잇다. 연이교회흥자미지유야(然而敎會興者未之有也)늘 주(主)님이 노(怒)여워하시니 내 엇지 침묵(沈黙)하리오.

五. 주일불수(主日不守)의 죄(罪)
감리교부진(監理敎不振)의 셋제 이유(理由)는 주일(主日)을 범(犯)하는 죄(罪)이다. 주일범(主日犯)하는 죄(罪)에 대(對)하야 감리교인(監理敎人)이라고 다-주일(主日)을 잘못 직히는 바 아니오 타교파인(他敎派人)은 다-주일(主日) 잘 직히는 바 아니나 감리교(監理敎)는 제4계명(第四誡命)에 대(對)하야 보다 등한(等閒)하엿다.
보라. 1931년(一九三一年) 통계(統計)에 의(依)하면 근6만교인중(近六萬敎人中) 매주일출석평균(每主日出席平均)이 3만5천4백인(三萬五千四百六人)이라 하여스니 전교인중(全敎人中) 거에 반수(半數)가 주일(主日)을 범(犯)하는 자(者)이다. 통계수자(統計數字)에 오(誤)가 잇는지 모르나 감리교인(監理敎人)의 주일집회력(主日集會力)이란 대단히 약(弱)하다 집회성력(集會誠力)이 업는지라 신앙(信仰)이 자라지 못하고 교회(敎會)는 힘을 일흘 수밧게 업다. 오십년간(五十年間) 주일(主日) 범(犯)한 죄(罪)가 금일(今日)의 감퇴(減退)를 치(致)한 것이다.

六. 교회(敎會)의 3대(三大) 화혈(禍穴)
엄정(嚴正)한 교리(敎理)가 잇고도 산 신앙(信仰)이 업스면 교회(敎會)는 쇠(衰)할 것이니 신앙부흥(信仰復興)은 냉각(冷却)한 현대(現代) 각(各) 교회(敎會)에 다 갓치 요구(要求)되는 바이다. 그러나 일(一)교회(敎會)로서 교리선언(敎理宣言)의 필요(必要)가 잇다면 애매(曖昧)한 선언(宣言)은 애매(曖昧)한 신앙(信仰)의 소산(所産)이오  애매(曖昧)한 신자(信者)를 내는 것일지니 신앙(信仰) 급(及) 교리(敎理)의 철저(徹底)가 감리교(監理敎) 급(及) 제교파부흥(諸敎派復興)의 길이오. 복음전도(福音傳道)가 敎會(교회)의 본무(本務)일진대 사회사업(社會事業)에 편중(偏重)한 현대교회(現代敎會)들은 방향착오(方向差誤)이다. 방향착오(方向差誤)의 길에서 회개(悔改)하지 안으면 어느 교회(敎會)나 전복(顚覆)될 것이다. 복음주의(福音主義)의 감리교(監理敎)가 교리(敎理)를 선언(宣言)함에 임(臨)하야 예수 재림(再臨)의 종결적(終結的) 중대교리(重大敎理)를 아버리고 그 대신 사회신조(社會信條)를 너흔 것은 심(甚)한 방향착오(方向差誤)의 근본(根本)이다. ……
주일(主日)은 하나님이 아담 즉(卽) 인생(人生)의게 주신 첫재 약속(約束)이다. 하나님의 첫재 약속(約束)을 범(犯)하고 망(亡)하지 안을 백성(百姓)이 업거늘 감리교(監理敎)는 교인(敎人) 중(中) 거에 반수(半數)가 주일범(主日犯)이 되고서 엇지 진흥(振興)할 수 잇겟는가.
신앙결(信仰缺)의 혈(穴), 방향오(方向誤)의 혈(穴), 주일범(主日犯)의 혈(穴)은 현대교회(現代敎會)의 3대화혈(三大禍穴)이다. 3대화혈(三大禍穴)을 통(通)하야 마귀(魔鬼)가 침입(侵入)하고 시대풍조(時代風潮)가 드러오고 한 이 3대화혈(三大禍穴)을 통(通)하야 은혜(恩惠)가 저나가고 능력(能力)이 저나간다. 감리교(監理敎)는 이 3대화혈(三大禍穴)을 막으사이다. 현대교회(現代敎會)는 이 3대화혈(三大禍穴)을 막으사이다.

감리교의 교세 침체가 교리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김인서의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장감 사이에 노출되기 시작한 거리감은 1934년 선교 50주년을 맞을 즈음 더욱 심해졌다. 감리교의 신학적 변천으로 한국장로교는 매우 불편했다. 1934년 감리교가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으로 아빙돈단권주석을 출간하자 둘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교파인식이 강하지 않았던 김인서가 볼 때도 아빙돈단권주석 출간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립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1936년 4월 김인서는 “장감양교충돌위기”(長監兩敎衝突危機)라는 글에서 그 심각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아빙돈 주석(註釋) 문제(問題)는 장감양교(長監兩敎)의 감정문제화(感情問題化)하게 된다. 주일학교연합회(主日學校聯合會)에서 감리교(監理敎) 유형기(柳瀅基) 목사(牧師)를 세계주일학교대회조선대표(世界主日學校大會朝鮮代表)로 선정(選定)한 데 대(對)하야 장로회(長老會) 평서(平西) 평북(平北) 황해제노회(黃海諸老會)에서 유목사(柳牧師)는 아빙돈 주석(註釋) 편집자(編輯者)란 이유(理由)로 대표권(代表權)을 부인(否認)하엿고 감리회(監理會) 충청(忠淸) 경성북지방회(京城北地方會)에서는 장로교(長老敎)에 항의(抗議)하기로 결정(決定)하여스니 찬송가(讚頌歌)갈니우고 연합공의회(聯合公議會) 깨여진 뒤를 니여 주일학교연합회(主日學校聯合會)도 깨여질 염려(念慮)가 잇는바 장감양교(長監兩敎)의 관계(關係)는 파열(破裂)이 될 위기(危機)에 잇스니 실(實)노 유감(遺憾)스럽은 일이다.
동(同)주석문제(註釋問題)로 日本神學界(일본신학교)에서 조선장로교(朝鮮長老敎)의 시대지(時代遲)를 비웃는다 함을 드럿거니와 이번(番)에는 세계(世界)의 조소(嘲笑)를 바들넌지 모른다. 세계(世界)가 웃던지 말던지 조선교회(朝鮮敎會)는 조선독자(朝鮮獨自)의 주장(主張)이 잇서 부인(否認)할 거슨 부인(否認)함이 가(可)하다. 여배(余輩)도 세계신학계(世界神學界)의 추세(趨勢)를 모르는바 아니나 여배(余輩)의 신앙입장(信仰立場)에서 동(同)주석(註釋)을 부인(否認)하는 자(者)이다. 장로교총회(長老敎總會)는 동서(同書)를 금지(禁止)함으로 족(足)한 거시다.  금서(禁書)은 감리회(監理會)에 대(對)한 모욕(侮辱)도 아니엇다. 그러나 일개번역서(一個繙譯書)를 가지고 차이상인신핍박(此以上人身逼迫)에지 이른다든지 동역서(同譯書)가 감(敢)히 장로교회(長老敎會)의 신앙(信仰)을 흔들 위력(偉力)이 업는 금일(今日) 장감양교(長監兩敎)가 정면충돌(正面衝突)에 이르기지 싸흘 필요(必要)는 업다. 교리문제(敎理問題)도 중(重)하지만 이 문에 사랑을 깨트리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흔들리지 않고 신학적 보수성을 유지해 온 한국장로교회와는 달리 감리교는 1920년대부터 신학적 변천에 열린 자세를 취해 왔다.
예일대 신학부를 졸업한 양주삼 목사가 협성신학교 교수로 합류하면서 성경비평학과 역사비평학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게렛신학교에서 프랭클랜 롤 교수 문하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수학하고 돌아온 정경옥이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모토 하에 협성신학교에서 공개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유형기는 문서 방면에서 진보적인 서적들을 여과 없이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일을 용기 있게 주도해 나갔다. 신흥우는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한국적 기독교를 모토로 내걸고 한국교회 안에 진보주의 사상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용도의 부흥회가 전통적인 말씀중심의 사경회운동에서 감성중심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으로 바뀌면서 신학적 변천은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양주삼은 교단 안의 리더십을 통해, 정경옥은 협성신학교 교수 사역을 통해, 유형기는 문서출판을 통해, 신흥우는 적극신앙단 조직을 통해, 그리고 이용도는 신비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감리교의 신학 흐름을 진보주의 방향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0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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