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집사와 안수집사 제도 도입

3․1운동의 민족적 아픔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성장을 계속했다. 1924년 초에는 “오(吳)씨 경건노인(敬虔老人)”이 전도헌금으로 금화 500원을 산정현교회에 기부하였다. 그 해 강규찬 목사는 산정현교회 당회원들과 당회에서 산정현교회 사상 처음으로 일곱 명의 여집사를 “자벽선정”(自辟選定)하여 임명했다. 피택된 여집사는 박문성(朴文誠), 이영선(李永善), 김경성(金敬惺), 전복희(田福姬), 최수락(崔受樂), 송안라(宋安羅), 조은식(曺恩植)이었다. 또한 산정현교회는 교회 사상 처음으로 우정순(禹貞舜), 유계준(劉啓俊), 오응백(吳應伯), 송민호(宋民鎬), 이찬두(李燦斗) 등 장립집사 5명을 투표로 선정하였다.
1925년 5월 13일 밤 평양산정현교회 유년주일학교는 교우와 관계자 1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장 김동원 장로의 사회로 찬양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날 어린이들의 가극, 무도, 독창, 그리고 졸업증서 수여와 시상이 있었다. 이날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의 발표는 그곳에 참석한 “천여 회즁의게 큰 깃붐을 주엇”다. 이어 “五월 十六일에는 쟝유년쥬일학교 학합 육백여 명이 강규찬 목 인솔하에 긔능에 가셔 원유회를 야 근년에 처음되는 대셩황을 일우엇다.”
산정현교회는 일제하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 역동하고 있었다. 산정현교회는 국내외적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번하이셀 부부, 담임 강규찬 목사와 산정현교회 장로들의 리더십, 전 교우들의 교회 사랑과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06년 설립 당시 188명이던 교세가 1923년에는 재적교인 1,000명으로 증가했고, 교회 재정도 200원에서 3,000원으로 무려 15배나 늘어났다.

1924년 12월 자신을 파송한 미국 모 교회에 번하이셀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편지했다:

한국의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에게 장차 도움이 될 기독교 관습과 제도를 받아들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노력들은 놀라운 결실을 거두어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우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의 주를 예배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으며, 그래서 해마다 수천 명의 교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는 당신의 대변자로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당신의 한국의 개인적 대변자라는 사실을 당신이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저와 저의 가족과 그리고 선교사들이 이 매력적인 선교지 이곳에서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역들을 위해 당신이 기도를 중단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1900년 20세기가 막 시작하는 바로 그 해 조선에 도착해서 24년 간을 사역한 번하이셀이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직접 목도하고는 자신을 파송해 준 교회에 감사를 전한 것이다.

-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펴양산정현교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0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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