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에 열려있는 신학교수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평양신학교 개교 후 로버트(라부열, S. L. Roberts)가 마포삼열을 이어 평양신학교 교장직을 맡기 전 25년 동안 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 대부분이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 아니라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평양신학교가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신학교로 발전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은 마포삼열, 이눌서, 곽안련 세 사람이었는데, 이 중 마포삼열과 곽안련 두 사람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동부의 프린스톤이라 불린 맥코믹신학교는 신학적으로는 구학파의 전통, 즉 프린스톤의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A. A. 핫지(A. A. Hodge, 1823-1886), 그리고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반영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기 선교사들이 맥코믹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이 구학파 전통에서 보수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이 학교가 여타 구학파 전통에 선 신학교와는 달리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맥코믹신학교가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는 프린스톤과 같은 구학파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무디의 영향 하에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미국의 구학파의 일반적인 분위기보다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이 어떻게 해서 신학적으로는 미국의 구학파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맥코믹 출신자들이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측면이 신학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육되었고, 자연히 그곳에서 배출된 목회자들이 처음부터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또한 본래 부흥운동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감리교와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장로교가 하나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감리교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이 장로교에 와서 더욱 저변 확대되고 놀라운 결실을 맺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세 명의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와 한국교회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간하배 선교사가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요 조직자이며, 수년 동안 이 학교를 인도해 온 빛”이었다고 평했던 평양신학교 교장 마포삼열 선교사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장로교의 성장을 주도한 평양의 지리적 여건을 신학교육과 연계시켜 평양을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마포삼열은 간하배 선교사가 지적한 대로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고, 백낙준 박사의 지적대로 “열정적인 순회전도자”였으며,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천부적인 상담자”였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평양신학교 교육의 전체적인 책임을 맡은 마포삼열 선교사는 맥코믹에서 구학파의 신학과 부흥운동의 중요성 두 가지를 몸소 체험한 데다, 그것을 12년 간의 한국선교 경험과 함께 신학교육과 연계시켜 평양신학교를 한국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신학교로 육성했던 것이다. 표준성경주석 서문에 밝힌 대로 그의 신학은 철저한 구학파 전통에 서 있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성경의 어떤 부분은 신의 말씀이나 다른 부분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는” 자들이 아니라 표준성경주석을 저술한 저자들과 같이 “원 저자의 쓴 대로의 모든 부분이 다 참되며”, “성경 전부가 영감된 말씀”으로 믿는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고백했다.

마포삼열이 얼마나 보수적인 칼빈주의자였는가는 1934년 선교 50주년을 맞은 희년기념예배 석상에서 행한 그의 기념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확신했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적 입장은 한국북장로교선교 50주년기념보고서에서 재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신앙은 미국의 구학파 출신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분명한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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