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로회 설립의 기초가된 자치, 자전, 자립

자치, 자전, 자립의 한국교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성장하고 파송한 모교회(母敎會)의 모습을 그대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한국적인 토착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세워지는 교회는 복음의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교회,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을 소화하고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성숙한 교회로의 발전을 교회 설립의 이상으로 설정하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치”(self-governing)의 교회이다.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것처럼 선교지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공식적인 대표자들은 안수 받은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육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개교회의 임시 직분자들을 세웠다. 세례 받는 자들이 증가하면서 교인들에 의해 지도자 선출이 시작되고, 그 다음에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개 교회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 역시 한국인 목사들이 안수를 받을 때까지 선교사 목사가 당회장이 되어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독립적이고 전적으로 자치하는 교회라는 사실이 반드시 강조되어 왔다.” 1915년 이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총회장에 선교사들이 선출된 경우가 없었고, “선교사들은 총회 석상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자치정신은 1922년에 채택된 장로교 헌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둘째,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는 “자전”(self-propa- gating)의 교회이다.
왜 한국교회가 그렇게 놀랍게 성장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저하지 않고 “주된 이유는 한국교회가 항상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라고 답해 왔다. 초기 선교사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임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에서도 이웃과 가족과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의무임을 일깨워 주었고,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사랑방을 복음 전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사경회 기간에 열리는 저녁집회는 일종의 전도집회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낮 동안에 참석자들은 오후에 한두 시간씩 나가 가까운 마을에서 축호전도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믿지 않는 자들을 저녁집회에 초청했다.” 한국인들에 의한 복음전도가 한국교회의 기적을 만들어 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고 2년 후 “1909년 가을 동안에 자신이 맡고 있는 교회를 방문한 스왈른(W. L. Swallen)은 600명 이상의 성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아 남녀 선교회가 먼저 조직된 것도, 1907년 노회가 조직되면서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1912년 총회가 조직되면서 중국선교를 시작한 것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자전하는 교회”(a self-propagating church)였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자전정신은 한국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12년 총회 당시 7개였던 노회가 1933년에는 24개로 늘어났다.

셋째,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자립”(self-supporting)의 교회로 자리 잡았다.
1890년에 방문한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을 채택한 후 한국교회는 자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했다. 1895년 기포드(D. L. Gifford)가 코리아 리파지토리(Korea Repository)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교회는 종교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한국인들 극소수에게만 선교비를 지원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한국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책을 사고, 교회 건물을 짓고, 자신들의 전도자들(preachers)에게 사례를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1901-1902년 평양선교부보고서(the Pyengyang Station Report)가 밝히듯이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자립의 능력이 어느 나라에서든지 처음부터 교회 자체 안에 있다”고 믿었다. 1893년 1월 장로회공의회 첫 모임에서 채택한 선교사역의 몇 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가 자립하는 교회였다. “적극적인 교회는 반드시 자립하는 교회여야 하고, 우리는 우리 선교회원들 가운데 의존율을 극소화하고, 대신 자립률을 증가시키고, 그러므로 헌금하는 교인들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1894년에 불과 26명의 세례교인과 그 정도의 학습교인과 몇몇의 교인들의 힘으로 소래교회가 건축된 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교회 건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세웠다. 1908년까지 188개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186개 교회가 자립하는 교회였다. 1909년 전환기의 한국(Korea in Transition)에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교회 건축 헌금에 보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저녁을 굶었고, 새 옷, 옥으로 장식한 은비녀, 그리고 반지를 헌금함에 넣었다.”고 전해 준다. 그런데 자립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 사역에서 자립은 초등학교, 유치원, 야간학교, 어린이 성경학교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한국교회의 자립과 관련하여 백낙준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자력운영정책(self-support)은 한국기독교회 창설에 있어서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 정책은 교인들에게 자립정신과 규칙적 헌금의 습관을 가르쳐 주었으며, 동시에 신앙의 자진전도를 가능하게 했다. 더욱이 이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한국기독교회의 서양화를 방지하였으며, 교회가 이국적이라는 인상을 어느 정도 막아냈다. ……무엇보다도 자력 유지정신과 실천은 기독교의 신속한 한국화를 조장하고 또한 자주치리를 촉진시켰다. 만약 “국민대표의 승인 없는 징세(徵稅)”가 국가정책에서 폭정이 된다면, 이러한 행위가 교회기관에서는 더욱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은 교회사업을 자력으로 운영하고 있으므로 교회에 참여권을 요구할 것은 자연한 형세였다. ……한국인들이 한국교회를 조직하게 되니 한국교회는 서양교회의 교도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주치리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 인도와 중국에서 논쟁의 근원이 되고 있는 선교사 지배 하의 “종교제국주의”와 “선교단체의 세력 퇴화” 문제가 한국에서는 심각하지 아니했다. 사실상 자립운영의 원칙은 한국교회의 신속한 성장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자치, 자전, 자립의 정신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실천해 왔다. 특별히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한 이후에 그와 같은 자립정신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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