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1907년 독노회의 설립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 위원 9명, 합 78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다. 바로 9개월 전 한국교회에 놀라운 성장을 점화시킨 그 역사적 현장에서 이 민족을 대변하는 독립된 민족교회가 태동된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에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길함, 배위량, 방위량, 윤산온, 소안론, 곽안련, 이눌서, 업아력 등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모두 참석했다.
지난해 장로회공의회 회장 배유진 목사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고, 게일 목사가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분병하였고, 배유진 목사가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하고 장로들이 분잔하여 성례식을 거행했다. 이어 그 해 공의회 회장이었던 마포삼열 선교사가 남북장로교, 오스트리아, 캐나다 장로교 총회의 허락을 받아 노회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설명하고 “네 곳 총회에서 얻은 권리대로 여러 선교사를 대표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노라”고 선언했다. 오후 2시에 속회된 노회에서 노회장 선거가 진행되어 게일 선교사의 천거로 마포삼열 선교사가 노회장에, 부노회장에 방기창(邦基昌), 서기에 한석진(韓錫晋), 부서기에 송인서(宋麟瑞), 회계에 이길함이 선출되었다.

1907년 노회는 종래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및 전라도 지방에 7개의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처리하도록 결정했다. 독노회가 장차 총회로 가기 위해 제도적인 틀을 마련한 것이다. 게일 선교사의 동의에 따라 노회 설립 후 노회 서기는 이 역사적인 노회 설립의 사건을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전보로 알려 주었다. 또한 노회장과 서기 이름으로 미국 남북장로교와 캐나다와 오스트리아 장로교회 총회가 한국장로교 노회 조직을 허락하고 노회가 은혜 가운데 조직된 것을 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84년에 시작된 한국장로교회가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의 민족교회로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첫 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인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가 목사로 장립받았다. 이들 가운데 서경조와 방기창(58세)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40세 전후였다. 이 7명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검증된 신앙인들이었다. 1888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 평양에서 마포삼열을 도와 복음을 전하다 관가에 체포되어 사형집행 바로 전에 사형을 면한 한석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모두가 많은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담보하고 복음을 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7명은 비로소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교회로부터 지도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안수 후 길선주는 장대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1908년 3월 1일 마포삼열의 도움을 받아 2,001명을 대상으로 첫 세례예식을 거행했다.

독노회가 조직되던 1907년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교회 785개, 세례교인 18,061명, 전체 교인 75,968명, 목사 49명, 장로 47명, 조사 160명, 남 전도인 58명, 여 전도인 38명이라는 규모를 갖출 만큼 외형적으로도 제법 틀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23년 만에 이와 같은 외형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선교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200년 전인 1706년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의 주도로 미국에 최초의 노회가 결성될 때 겨우 7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1907년의 한국의 독노회는 미국보다 더 큰 외형적인 모습을 갖춘 상태에서 조직되었다. 시기가 다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그리고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조직적인 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한국장로교 독노회 조직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독노회 조직은 부족하지만 우리의 형편을 반영하는 신앙고백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또 해외선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가 도약의 틀을 다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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