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만 총 3개의 노회가 설립

 

활발하게 전개되는 만주선교

만주에만 총 3개의 노회가 설립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만주는 한국인들에게는 간도로 잘 알려진 곳으로서 이 지역에는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3배나 더 많았다. 만주는 본래 한국 영토였으나 1908년 중국이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중국 땅으로 만들었다. 일제의 경제 찬탈이 강화되던 1910년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간도로 이주하여 만주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윌리엄 스캇의 증언에 따르면 1910년에 불과 9만 명이었던 한인들의 수가 1918년에는 줄잡아서 233,000명으로 증가했다. 간도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복음에 귀를 잘 기울였다.” 따라서 이곳에 대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관심은 처음부터 아주 높았다. 만주선교는 지역적인 성격상, 평안도와 인접한 남만주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았고, 동만주는 함경도 교회와 캐나다 선교회가 맡았다.

만주에 사역자를 파송하기 시작한 것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1년 만주에서 사역자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평안북도 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사역자 한 명이 그곳으로 파송 받았다. 1902년 가을, 그곳을 방문한 휘트모어(魏大摸, N. C. Whittemore, 1870-1952)가 상당수의 신자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이 정기적으로 이 지역을 방문했다. 그리고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이곳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독노회에 선교사를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제 4회 독노회 때 북평안대리회에서 서간도 선교사를 청원했고, 함경대리회와 전도국장이 김영재를 북간도 선교사로 청원하였으며 평북대리회에서 김진근을 서간도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들의 활동으로 간도에서는 복음이 꾸준하게 전파되었다.

1906년 중국 관리가 당국의 허가 없이 교회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나싯차이(Nasitchai)에 있는 교회를 폐쇄하여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 당하는 수난이 있었지만 복음은 그 가운데서도 꾸준하게 전파되어 1915년 3명의 한국인 사역자의 지도 아래 45개 교회, 2,750명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중 9개 교회는 100명 이상의 교세를 갖추고 있었고, 가장 큰 교회는 227명이 출석했다. 그 외에도 360명의 학생이 출석하는 학교가 15개가 있어 직접선교와 간접선교를 병행하면서 성공적인 선교를 감당하고 있었다. 다시 5년 후 1920년에는 교인 3,327명, 주일학교 33개, 소학교 22개, 성경학교 1개로 남만노회(南滿老會)를 설립할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인 1921년에는 교회 44개, 교인 4,468명, 주일학교 66개, 성경학교 1개, 소학교 22개, 중학교 2개, 각종 학교 2개의 교세를 가진 간도노회(1925년에는 동만주노회로 명칭을 변경함)가 조직되었으며, 10년 후인 1931년에는 27개 교회, 1,776명의 교인, 4명의 목사, 16명의 장로, 33개의 주일학교, 51개의 소학교, 1개의 유치원의 교세를 가진 북만노회가 설립되어 만주에만 총 3개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하여 간도는 복음이 가장 번창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국교인들이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데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서양 선교사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적합할 것으로 생각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2 07:40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