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이 사는 어디에도 복음을 들고 달려감

 

몽고의 동족에게까지 달려가 선교

 

1930년대 들어 한국선교의 진행이 눈부실 정도로 성장하자 중국교회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는 140명의 인구를 가진 내양현 전체 선교사역을 한국장로교 선교회로 이양한 후 이웃에 있는 해양현(海洋縣) 일부를 선교지로 편입하였다. 이곳의 선교사역은 놀랍게 확장되어 1933년에는 20여 개 교회, 30여 개의 기도처, 세례교인 1,000명, 그리고 10개의 학교가 운영되어 내양노회를 조직할 만큼 교세가 발전했다. 여기서도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자립, 자치, 자전이 시행되었고, 송상절, 김익두, 이대영의 부흥사경회를 통해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36년 방효원이 은퇴하고 그의 아들 방지일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곧 이어 발발한 대동아전쟁으로 박상순, 이대영 선교사와 함께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방지일은 전쟁으로 선교지에 부임해 보지도 못하고 청도(淸島)로 선교지를 옮겨야 했고, 박상순은 1940년에 귀국하였고, 이대영 선교사도 1948년 중국 공산화로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중국에 남아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방지일 선교사도 1957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해야 했다.

일본, 시베리아, 만주, 중국 외에도 1925년 감리교는 최성모 목사를 몽고에 파송하여 몽고의 교포를 대상으로 선교를 개시했다. 이처럼 중국과 만주와 시베리아와 일본과 몽고를 선교지역으로 삼았던 것은 한말(韓末)에 이미 그곳에 백만이 넘는 교포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접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동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졌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로스를 통해 복음을 접한 의주 청년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 왔었다. 실제로 복음을 접한 이들은 복음의 불모지를 찾아가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이 민족에 대한 가장 값진 사명이라고 여겼다. 교회가 “선교사역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번은 선교위원회가 대구에서 1,000명의 교인을 맡고 있는 그 교회 담임목사를 선택하여 중국에 파송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는 기꺼이 선교지로 갔다.”

유난히 한국교회는 처음 출발부터 국내외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모든 한국교회가 희생과 헌신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양선의 말대로 “선교사업은 그들에게 언제나 정신의 안정과 민족적 긍지와 희망을 주었고, 특히 그곳들의 교육사업은 교회가 거의 전담했다.” 선교비를 외국 선교사에 의존하지 않고 본국의 각 교회가 감사한 마음으로 연보하여 마련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처음부터 한국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의 교회라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이처럼 “선교는 한국교회의 특징의 하나이며 자랑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하였고, 선교를 통해 활력을 얻을 수 있었고, 선교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하기 위해 선교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선교하는 한국교회를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하는 교회로 복을 주신 것이다.

돌이켜볼 때 한국교회가 조직되면서 스스로 선교한국의 틀을 다져 갈 수 있도록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고 거시적인 결정이었다.


-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2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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