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과 일본의 신민화 작업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강제적으로 한국을 합병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집요하고 줄기차게 추진해 온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1895년 10월 7일 명성황후 시해,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을사조약, 1906년 초대총독 이토 히로부미의 서울 부임, 1907년 고종의 퇴위, 그리고 1909년 7월 12일 한일의정서를 통한 국내 통치권 장악에 이어 7월 13일 한국 군대마저 해산시킴으로써 일제는 한일합방(the Annexation)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왔다. 1909년 7월 6일, 일본의 내각회의는 한일합방을 위해 이른바 구라찌안(倉知案)이라는 합방 계획을 비밀리에 확정했다. “한국을 전연 폐멸(廢滅)하여 일본 영토의 일부로 만들 것”과 “문자도 병합으로 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다시 일본은 한국과 강제로 맺은 “신 협약”을 통해 일본인 외에 어떤 외국인도 청빙할 수 없도록 명문화시키고, 한국 관리의 임면(任免)까지 간섭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와 같이 한국 강점의 기반을 구축한 일본은 1910년 5월 일본의 현직 육군대장인 데라우치 마사타케(侍內正武)를 통감으로 임명해 헌병경찰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내의 모든 언론을 탄압한 가운데 한일합방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통감 내한 3개월 후인 1910년 8월 22일, 드디어 한일합방 비준서가 “일제 헌병의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 이완용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의 의결을 거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 사이에 조인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8월 29일 포고되었다. 이 주권 강탈 문서는 “일종의 위증서”나 다름없는 것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변하는 사내(寺內)와 매국노 이완용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각료들에 의해 조인된 문서에 불과했다. 황제는 왕으로 격하되고 국호도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되었고 모든 통치는 조선에 설치된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제는 한일합방이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조선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허위로 알리기 위해 1910년 6월 23일 일진회라는 유령단체를 조직하여 친일세력을 끌어들인 다음 이들의 청원에 의해 한일합방을 추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한일합방 조약은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조인으로 체결되었고 그 이튿날 일본 천황이 이를 공포했다. 이로써 한국은 사라지고 일본제국의 한 속국으로 편입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세 차례의 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 내정권, 군사권을 탈취한 일제는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을 아예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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