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과 일본의 기독교

대부분의 일본의 여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한국의 식민화를 적극 지지하고 찬성했다.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던 8월 22일, 일본교계의 저명한 지도자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는 복음신보(福音新報)에 일본의 한국합병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를 예찬하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한국은 마침내 일본제국의 판도 안에 병합되었다. 아침 해에 깃발이 빛나서 계림(鷄林)의 아침이 진실로 더욱 신선하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축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도 생각되는 국민적 친권자로서의 본분 등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게 되었고”라고 운운하며 일본의 한국합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도히 아키오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전쟁과 한일합방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것으로 인류의 진보 계발을 재촉하는 계기로 염원했다.”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삼대교회는 모두 이를 찬성하였고, 감리교 감독 혼다 요우이찌는 한국합병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우에무라는 종교와 정치는 결탁해서는 안 되지만 한일합방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고, 일본조합교회는 정부에 고용되어 어용적인 목적으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의 기독교가 어떤 형태로든 조선을 자신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에 기여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에 부합하려는 듯, 한일합방이 체결된 뒤인 1910년 10월 일본조합교회는 제 26회 총회의 신도대회에서 와다세 죠오기찌(渡瀨常吉, 1867-1944)를 주심으로 선출하고 1911년 6월부터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와다세 죠오기찌는 1913년 조선전도의 급무에서 정치적 합방을 이룩한 일본이 영구적인 신민화 작업을 위해서는 정신적 감화가 필요하며, 정신적 감화는 정치가나 군인들보다 종교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쳐 댔다. 종교적 권위를 가지면서도 정치와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한 가운데 조선인들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심어 주는 일은 기독교인들밖에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와 같은 교화작업은 정치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신민화 작업을 민간 차원에서 대행하는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고 나선 일본조합교회 와다세 죠오기찌는 1911년 6월 에비나와 함께 한국에 입국해 총독을 비롯해 당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 이와 같은 취지를 알리고 서울과 평양에 교회를 설립했다. 7월 16일에 설립한 서울의 한양교회에는 담임 홍병선, 후에 집사가 된 유일선(柳一宣)을 비롯해 7명이 참여했다. 와다세는 7월 23일에는 총독부 관리인이자 그 교회 첫 집사가 된 무라가미(村上唯吉)의 협조를 얻어 평양 서기산 중턱에 기성교회(簊城敎會)를 설립했다. 그 해 12월에 10개, 1912년 남조선에 11개, 서조선에 4-5개를 설립하는 등 교세 확장에 나서 1918년 말에 이르러 149개 교회, 86명의 교역자, 13,631명의 교인으로 성장했다. 조합교회는 선교 개시 10년 만에 150개 교회, 70명의 한인 목회자, 한국인 신자 1,500명의 교세를 가진 큰 교단으로 성장했다. 조합교회가 이처럼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만이 아니라 데라우치(侍內), 오쿠마(奧間), 시부자와(澁澤), 이와자키(岩崎), 미쓰이(三井久), 스미토모(柱友), 후루카와(吉河市兵衛) 등 정계와 재계까지 동원하여 거액의 선교헌금을 모금하고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 포교활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한국인들에게 교회를 다니려면 조합교회를 다니라고 노골적으로 부추길 정도로 조합교회는 총독부의 비호와 지원을 받으며 한국선교를 추진했다. 총독부로서는 민족교회와 방불할 정도로 응집력이 강한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약화시키고, “여하간에 귀찮은 선교사들을 독립심, 애국심에 불타는 한국인 교인들로부터 격리”시켜 조선기독교를 일본 제국주의에 동화시키려는 신민화 작업을 충실하게 대행하는 조합교회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인 1919년 4월 14일, 국내의 조합교회는 3․1운동이야말로 반민족적, 반기독교적 행동이라고 규탄하는 “시국운동선언”을 발표해 반독립운동의 선봉에 설 만큼 어용 중의 어용단체였다. 어떤 면에서 조합교회는 교회라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로는 한국의 신민화 작업을 위한 일본정부의 시녀에 불과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기독교 안에 민족주의운동이 강하게 일면서 조합교회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1920년 말 거의 15,000명에 육박하던 교세는 1921년 2,955명으로 급감했다.
이처럼 처음부터 일본 교회와 지도자들은 한국의 신민화 작업의 선봉에 나섰다. 일본은 양전백, 최병헌, 현순, 주공삼, 이상재, 이원긍, 장낙도 등 한국교회 지도자 29명을 초청하여 1911년 8월 6일 일요일, 동경후지미교회(富士見敎會)에서 이들의 환영식을 열었는데, 바로 그 환영식 석상에서 일본 교계 원로 우에무라(植村正久) 목사는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이렇게 강변했다:

근간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은 동조공근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오늘에는 정치상으로도 한 나라가 되었고, 다시 신앙 상으로 말하면 주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이어 나온 일본기독교회 교역자 대표 가와소에 목사는 한일합방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우리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국가적 경계를 철거하고 일․선 양 민족이 동일 국민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다. 이것은 정치가(政治家)나 외교가(外交家)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대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 의미 깊은 일이 시작되는 오늘에 유력한 조선 목사 29명이 친히 와서 내지(內地)의 동료 및 형제 자매와 친선을 도모하게 된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여러분의 내유(來遊)에는 반드시 신의 사명이 있다.

마치 어용사가(御用史家)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하며 일본의 군사적 침략행위를 비판했던 그의 전력으로 볼 때 이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2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2.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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