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인구령운동의 불씨: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


백만인 구령운동을 촉진시킨 또 하나의 움직임은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였다. 스톡스, 갬블, 리드가 개성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는 동안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길선주가 평양의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교회의 박치록(朴致祿) 장로와 함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두 달 동안 새벽 4시에 모여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평양대부흥운동의 목격자 된 길선주, 그리고 그 부흥운동을 한반도와 중국에까지 저변확대시킨 주인공 길선주 목사는 갑작스럽게 시들기 시작한 부흥운동의 열기를 목도하면서 전에 없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누구에게 알리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이들의 새벽기도는 곧 장대현교회의 많은 교우들이 알게 되었고, 은혜를 받는 일에 누구보다도 욕심이 강했던 교인들이 하나 둘씩 새벽기도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참석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길선주 목사는 주일 대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원하면 며칠 동안 새벽 4시 반에 모여 기도할 수 있다’고 광고했다. 새벽기도가 많은 교우들에게 알려진 이상 더 많은 이들이 기도회에 동참하여 기도의 힘을 모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시 30분에 종이 울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튿날에는 새벽 1시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2시에는 수백 명이 모이더니 4시 30분 종이 울리자 4백 혹은 5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벽기도의 열기는 한층 더해갔다. 며칠 후에는 6백에서 7백 명 사이의 교인들이 여기에 합류했고,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겠다고 작정하는 이들이 놀랍게 생겨났다. 새벽기도를 공식적으로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새벽 기도에 참석한 이들이 날 연보를 작정한 것이다:


넷째 날 새벽에 기도하는 동안 갑자기 전 회중은 무관심, 냉랭함, 사랑의 결핍, 사역에 대한 열정의 결핍 등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다. 그 후 용서의 기쁨이 찾아왔으며 하나님에 대한 사역의 방식들과 수단들이 현시되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4일 새벽을 더 보내면서 지금이야말로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길선주 목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 하루를 불신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드리겠는가를 물었다.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런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틀을 갈 수 있는가를 물었다. 다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삼 일을 요청하자 손을 든 사람은 더 적었으나 아직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고, 4일, 5일, 그리고 6일을 말하자 수가 점점 줄어들었으나 심지어 7일을 말하자 꽤 여러 명이 손을 들었다. 그 다음 주일에 그들이 참여했던 성찬식은 축복된 성찬식이었으며, 그 후 전 교회가 열심히 나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영적각성이 특징이었던 평양대부흥운동 때와는 달리 회개와 통회의 역사보다는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결단들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길선주 목사가 의도한 바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결과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민족복음화라는 위대한 과업을 깊이 느끼고 있던 길선주 목사에게는 교인들이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새벽기도에 찾아오는 신자들은 역시 장대현교회 교우들 중에서도 열심이 있는 신자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날 연보 작정은 시의적절한 제안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작정된 날연보는 무려 3,000일이 넘었다.


이렇게 해서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새벽기도는 다시 전국교회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확실히 새벽기도는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을 발흥시킨 중요한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앙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라면 새벽기도회에 참여했고 이 새벽기도회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민족적, 영적 에너지를 한데 응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 때부터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정착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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