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01월 26일/신유사옥 

비록 천주교의 포교가 여전히 금지되기는 했지만 18세기 말 정조가 왕위에,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사라졌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잠입한 후 천주교는 제도적인 면에서나 교세에 있어서 전에 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1799년 채제공이, 그 다음해 정조마저 세상을 떠나자 지금까지의 형세가 일변했다.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던 정조와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반대파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신유사옥이다. 이 탄압은 외척세력으로 정치의 실권을 잡은 노론 안동김씨 일파가 천주교를 배경으로한 남인의 세력을 타도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창구 역할을 한 인물이 1800년에 즉위한 순조와 그의 후견인 영조의 계비 대왕대비 김씨였다.

1801년 1월 26일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파 재사인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했고, 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등이 유배를 당하였으며, 3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잠시 피신해 있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도 자수했으나 곧 처형되었다. 이런 일련의 박해 사실을 담은 서신을 비밀리에 프랑스 신부에게 전달하려던 천주교도 황사영도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계속된 박해로 국내 천주교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신앙의 불길은 오히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0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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