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사건의 발단

1912년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 105인 음모사건(The Korean Conspiracy Case)에서 지적한 것처럼 총독부는 자신들이 볼 때 놀라운 성장을 구가하며 민족의 구심점으로, 민족계몽과 사회개혁의 선도자로서 자리 잡아 가는 교회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운동이 기독교와 모종의 연대성을 가지면서 발전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으며, 그 배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 “선교사들과 국내 그리스도인들을 의심해 왔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의 호의를 받으며 한국을 방문했던 친일 지도자인 예일대학의 조지 래드(George T. Ladd) 교수는 선교사들의 불편중립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선교사들 중의 아무도 정치적으로 이제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고 주장할 수 없다”며 재한 선교사들에게 의심의 눈총을 보냈다. 이것은 일본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의 대변인 미도루 코마츠(Midoru Komatsu)도 선교사들을 향해 “그들은 한국에서 기독교를 확산시키고 있지만 한국의 주권자, 일본의 이익에는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황에서 일제는 선천, 정주, 평양의 교회 지도자들을 말살하고,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당한 뒤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안태국, 이동휘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를 말살할 계획을 세웠다. 애국사상을 바탕으로 조직된 신민회는 회원의 생명과 재산이 회(會)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규정된 강력한 비밀결사로 한국 유일의 독립운동단체였다. 한국의 주도적인 미션스쿨 혹은 민족학교로 알려진 평양 대성학교, 정주 오산학교, 평양 숭실학교와 선천 신성학교는 배일사상이 강한 학교였고, 평양, 정주, 선천교회는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안창호가 평양에서, 이승훈이 정주에서, 양전백이 선천에서 강력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1909년 이등박문이 저격당하고 부임한 데라우찌 세이기(寺內正)는 한편으로는 헌병제도를 실시하고, 또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반일사상을 가진 자들을 무참하게 투옥, 고문하는 등 무단탄압정치를 실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하는 한국교회를 원천 봉쇄할 묘수를 찾고 있었다. 대부흥운동과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놀랍게 신장하는 한국교회야말로 정치적인 모사를 일으킬 수 있는 “상당히 단결된 단체”이며 일제의 영구적인 한국 식민 통치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선천 지역의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의심의 표적으로 지목되었고, 그 중심에는 조지 매큔(George S. McCune, 尹山溫, 1864-1939)과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1894-1939)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12월 29일 데라우찌 총독이 선천을 지나가는 기회를 타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며, 총독암살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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