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부흥이후에 더 두르러진 특성, 가족전도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 신앙을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키기보다 그 신앙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해 주는 습관은 부흥운동 이전부터 있었던 현상이지만, 그 같은 현상은 부흥운동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종교적인 헌신이 거의 없이 이제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한국인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먼저 자신의 형제를 생각하고, 성령의 은사가 성결과 권능으로 그에게 임하면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친구를 위해 혼신으로 기도한다.
지난해 한국 전역에 일어난 놀라운 부흥 기간 동안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선교사들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국인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였고 또 이와 같은 기도가 놀랍게 응답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도에서뿐만 아니라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결실이 무성하다.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개인적이고 급료를 받지 않고 손에 손을 잡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도 사역이 행해지는 곳이 이 세상에는 아무 데도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복음을 접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국인들이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형제와 친구와 이웃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평양의 한 보통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평양 숭실학교에 다니는 한 젊은이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열정도 없고 개교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에 불과했다. 그러다 1907년 초 있었던 부흥 집회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그는 믿지 않는 그의 부모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그의 부모 또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기 전 그는 존 무어에게 자기의 고향 교회에서 소년들을 위한 여름학교를 개설하고 싶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고, 또 실제로 여름 성경학교를 개설 운영했다. 그것은 그의 고향 교회 전도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존 무어는 이와 같은 사람, 곧 은혜를 접한 후에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혀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부모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한 사람을 그밖에도 대여섯이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한 나이 많은 그리스도인 여인이 병들어 죽어가면서 큰 아들에게 간곡히 복음을 전했고, 그 아들은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언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내 지난 수년 동안 어머니께 불순종했는데, 이제 내도 믿겠습니다”라며 울부짖는 일도 있었다.
어찌할 줄 몰라 떨고 있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의 선언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나타나는 복음 본래의 특성이었다. 그들은 적절한 기회를 보아 가면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1908년 11월 30일자 예수교 신보에는 당시 경상남도 동래 두구등교회에서 시무하는 조사 정덕생이 자신의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담은 짧은 글이 게재되었다. 이것은 당시 그들이 얼마나 가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본 교회 령수 정현의 씨 쥬를 밋은 후에 그 부인의게 쥬의 말씀을 권면오되 그 부인이 밋지 않 고로 샹 섭섭히 녁이더니 로 긔도 에 그 부인이 예치 안 거슬 보고 닐 이제 부인과 내가  집에 잇슬 수가 업스니 나 멀리 나겟다 고 쟝을 차리니 그 부인이 마지 못야 그러면 내가  긔도겟이다 고 그날부터 밋은지라. 셩신의 감화을 닙어 온 집안 식구가 다 죄를 회하고 신실이 밋사오며  손님 졉기를 심히 두터히 며 형뎨를 으로 랑시는 즁에  례당이 업 고로 긔의 논을 파라 엽젼 二百량 주고 간집을 사셔 례 보옵더니 형뎨 들이 열심으로 연보와 지금은 례당을 느리 즁이오니······이곳 교회를 위야 긔도로 도와주옵소셔.

너무도 원색적이고 직설적이라고 할 만큼 불신앙과 정면으로 맞서서 복음 전래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먼저 복음을 접한 이들이 다른 가족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해 그 이튿날 자신의 가족들을 사경회 저녁 전도 집회에 인도하여 함께 참석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다. 그리고 일단 참석한 후에는 그들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먼저 은혜를 받은 이들이 저녁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서 몸부림치는 어느 형제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는 모습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부흥운동 동안 한 강인한 남자가 죄의 확신으로 탄식 가운데 울부짖는 극심한 절망에 처해 있을 때 매우 아름다운 것은 똑같은 갈등을 겪고 결국 승리를 한 다른 사람들이 그 형제에게 가서 자신들의 팔로 그를 감싸 주고 그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개인적인 애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이 놀라움은 더욱 컸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당시로서는 결코 과장된 것도 또 보기 드문 현상도 아니었다. 복음의 은혜를 접한 이들이 이와 같은 일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었다. 가장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 모든 다른 가족들이 가장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많았다. 가부장 제도권의 사회 속에서 가장의 결정은 곧 다른 이들에게 같은 노선과 길을 걸어가도록 촉구하는 자연스러운 동기가 되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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