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우스정책의 성공현장 한국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자립, 자치, 자전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정책인가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언더우드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은 가난한 나라다. 한국에는 부유한 상인들의 큰 조합이 없으며, 그곳의 자산도 액수가 적다.” 한 사람이 100달러 혹은 200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주로 한 칸짜리 작은 방 하나 혹은 두 칸짜리 창호지로 바른 창 하나가 있는 초가집에 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산둥성에서 온 중국 상인들, 목수들, 건축업자들, 혹은 다른 사람들은 한국이 산둥성에 비해 더 가난하다고 말한다. 확실히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의 성공이 한국인들이 중국인들 보다 더 부유해서는 분명히 아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따라 선교사들은 한국인들 가운데 사역자들을 택하여 세웠다. 비록 선교사들 가운데는 무급 조사들을 여러 명 데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각 선교사에게는 한 명의 유급 조사만이 주어진다. 감독할 교회가 30개 혹은 40개 이상으로 늘어나 도저히 한 명의 조사로는 사역 현장을 지도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을 때는 추가로 한 명의 조사가 더 허락될 수는 있다.
전도사나 목사의 사례비를 외국 선교비에서 지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계속 접촉하기 위해 조사가 필요하지만 복음 전도와 전도사들의 사례, 새로운 선교지의 복음 전파 사역은 한국인 교회에 그 책임을 맡긴다. 비록 선교 초기에 비용의 반을 선교비에서 부담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교회와 예배당, 그리고 초등학교 운영비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부담한다.
처음부터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한국 교회에 안겨 주었다. 필요한 자금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부담해야 했고, 가능한 어느 곳에서나 한국인들 스스로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그 일을 위해 지도하고 권면하며 도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주님의 가장 귀한 명령이며,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특권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언더우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한국 교회에서 특히 부흥운동 기간 동안 네비우스 선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말해 준다:

나는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의 진보가 주로 하나님의 축복 곧 우리가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 정책 덕분이라고 믿는다.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파에 대한 부담감이 지워진 사실이 전국에 걸쳐 복음 전파를 급속히 수행하는 진지한 기독교 사역자들의 교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불완전하게 조직된 188개의 교회 가운데 186개가 완전히 자립하고 있다. 그곳에는 거의 3,000명의 성인 교인들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865명이 지난해에 증가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의 진보”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 덕분”이라는 언더우드의 평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마펫도 1909년 8월 29일 북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자립, 자치, 자전”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찾았고, 1937년 북장로교 선교 보고서에서도 한국 교회 성장이 “현대 선교역사의 위대한 기적 중의 하나”라고 평한 후 그 원인을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찾았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1.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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