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인구의 2/3가 죽은 관동대지진

비록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일본정부가 한국인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다루었는지를 잘 대변하는 것이 관동(關東) 대지진 한국인 대학살 사건이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불과 4년 후인 1923년(大正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동경 요코하마를 비롯한 관동(關東) 일대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홉컬크(Hopkirk)는 하나님의 은혜로 극적으로 그곳을 탈출하고 코리아 미션 필드에 “도쿄에서의 최후 장면”(Last Glimpses of Tokyo)을 기고 “무시무시한 지진”과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카고 마샬 필드 사(Marshall Field & Co.) 바이어로 있는 한 미국인은 자신의 아내를 태우고 요코하마로 향하던 택시가 갑자기 땅 속으로 사라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9월 1일에 발생한 화재는 5일간 계속되었다. 동경과 요코하마를 위시한 시가지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각처의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피해가 대단했다. 동경 시내 630,860호 가운데 407,992호가 전소되어 동경 시내의 3분의 2가 피해를 입었다. 이 지진으로 사망한 사람만도 9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 76,000명은 화재로 사망했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부터 일기 시작한 화재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자 곧 이어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58분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오후 1시부터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해 3시경에는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의 방화가 많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현장에 있던 홉컬크의 증언대로 “물론 들려오는 많은 보고들은 단지 근거 없는 루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유언비어는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루머는 화재의 원인을 조선인들에게 돌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 다음날 9월 2일 오후 2시 5분 경부터는 방화의 책임은 물론 폭동의 책임까지 조선인들에게 돌리는 루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요코하마에서 일어난 큰불은 대개 한국인의 방화에 원인이 있다”는 루머가 오후 2시에 일더니 4시에는 “한국인들이 하라마찌다(原町田)를 습격해서 청년단과 충돌하고 있다”는 루머로 확대되었고, “부녀자를 살해”했다, “폭탄과 극 독약을 사용하여 동경 시민의 전멸을” 꾀하고 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9월 4일에는 경찰서에서 탈옥했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지진이 일어난 전 지역에 놀라운 속도로 무섭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9월 4일 오후 6시 30분 경에는 “한국인들이 시내의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였다”는 루머까지 돌았고, 한국인들은 이 과정에서 이상한 암호를 사용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경찰서의 조사 결과 이 부호들은 중앙청결회사의 인부들이 단골표시와 변소가 있는 장소의 방향과 수량을 표시하는 부호였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각종 신문이 유언비어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게재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군인 경찰 자경단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방화, 폭탄 투척, 우물에 독약 투입, 강간, 폭력들의 죄명으로 살해되었다. 어떤 사람은 총으로, 어떤 사람은 일본도(日本刀) 혹은 죽창(竹槍)으로 살해되고, 살해된 후에는 시체를 불에 태우면서 필설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잔혹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수백 명을 일시에 총살한 일도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몸을 전신주에 결박하고는 먼저 눈알을 뽑아내고 다음에는 코를 자르고, ……어떤 이는 그런 참혹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시키고 나서 배를 찔러 죽이기도 했다. 기차 안에서는 한국인을 찾아내어 문밖으로 던져서 치어 죽게 하며, 또 남녀 수십 명을 전부 발가벗겨서 걸어가게 하다가 죽이기도 하며, 혹은 발가벗겨서 몇 시간 동안 춤을 추게 하며 동물적인 희롱을 감행한 후에 찔러 죽이는 일도 있었다.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차서 시체에까지 능욕을 가하기도 하고 부인들을 보면 양쪽에서 두 다리를 잡아 당겨서 음부를 칼로 찌르고, 몸을 토막토막 찢고, 잘라서 죽이면서 여자는 이렇게 죽이는 것이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2.09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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