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오순절, 그 둘째 날


화요일 저녁, 집회는 어느 때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날의 집회는 길선주가 맡았고 전날의 전도집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그날 설교를 맡은 길선주의 얼굴은 이전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게일이 그 현장에 있던 목격자의 증언을 인용해 기술한 것처럼 그날의 길선주는 단순한 설교자의 모습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 다음날 밤……길선주는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때 완전 장님이었다가 아직도 장님인 길선주, 그러나 여기서 그의 얼굴은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고백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마포삼열, 길선주, 이길함

거룩함에 불타는 길선주의 외침은 오순절 날 베드로가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쳤던 능력과 권능의 메시지였다. 1904년 웨일즈부흥운동 때 로버츠(E. Roberts)가 했던 역할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길선주가 한 것이다. 길선주가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자“시내산의 섬광”이 그들 위에 임했으며,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자료를 종합할 때 15일 화요일 저녁집회는 모든 면에서 월요일의 집회와 대동소이했지만, 성령의 임재는 더 강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월 18일 그 현장에 있던 스왈른(W. L. Swallen)이 지적한 것처럼 이날 저녁집회의“성령의 역사는 전날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만 더 강하게 나타났다.”그날 그 현장에 참석한 장로들과 목사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기, 공금횡령, 그리고 실제적인 도둑질을 고백했다. 스왈른의 말대로“그것은 진실로 마지막 심판을 보는 것처럼, 너무도 무시무시했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의 장면을 설명하기에 더 이상 어떤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순절 둘째 날 역시 모든 사람들은 가장 깊은 숨겨진 죄악들까지 드러내시는 성령의 역사 앞에 마치 마지막 심판날에 심판주 앞에 서 있는 죄인처럼 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견딜 수 없었다. 미국 1차 대각성운동 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도한 것처럼“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의 타고난 비참한 상태를 의식하면서 각성”되었고,“양심의 갑작스런 찔림으로 마치 심장이 화살에 꿰뚫린 것처럼” 자신들의 온갖 죄악들을 토로했던 것이다. 김인서는 그 역사적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二千名 以上을 收容하는 章臺峴禮拜堂에 會衆이 차고 넘치도록 모힌 査經會員全體가 聖靈의 휩쓸닌 바 되여 或은 소리처 울고 或은 가슴처 痛哭하고 或은 嗚咽하야 祈禱하고 或은 발을 구르며 自服하고 或은 춤을 춰 讚美하니 소리소리 合하야 소리의 기동은 燔祭檀에 타오르는 불기동갓치 하늘노 떠오르고 떠올낫다. 이때에 이 자리에 잇는 사람으로는 眼中에 들보를 녓코 견댈 수 잇을넌지 모르거니와 良心에 몬지만 한 罪라도 두고는 견댈 수 업섯고 혀를 끈흘지언졍 말치 못할 罪惡이라도 萬人의 압헤 내여노치안코는 견대지 못하며 吉長老의게 告解를 하지 안코는 그대로 돌라갈 수가 업섯다.


그날 그 사경회 마지막 저녁,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 장로와 전날 강유문이 미워했다고 말한 장대현교회 김 장로의 회개였다. 월요일 저녁 강유문의 회개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김 장로는 이날 고개를 숙인 채 강단 뒤에 장로들과 함께 앉아 있다 강단 앞으로 나와서는 강단을 붙잡고 “교회의 장로인 나는 강유문뿐만 아니라 방 목사를 미워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며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김 장로는 블레어 선교사에게 돌아서면서 “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블레어 선교사는“아바지, 아바지……”만 계속할 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청년회 일을 하는 김 장로의 그와 같은 고백은 블레어에게는 “그보다 놀란 적이 내 생전에는 없었다”고 술회할 만큼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블레어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동료 선교사 그레이험 리의 지적대로 블레어 선교사가 “겪은 고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김 장로의 고백은 마치 기름에 불을 던지듯이 그곳의 집회를 회개의 도가니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고꾸라지자 온 청중 가운데 갑자기 회개의 울음바다가 되어 너나할 것 없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참석한 모든 선교사들이 한데 어울려“예배당 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흐느껴 울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가 나온 것이었다.

 

이와 같은 회개의 울음이 온 실내를 가득 메운 가운데 강유문이 일어나서는 고뇌 가운데 기도하다가 마치 자신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완전히 나자빠져 흐느껴 울부짖었다. 오순절 둘째 날 성령과 회개의 역사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몇 사람은 바닥 위에 몸을 던져 죽 뻗어 있었고, 수백 명이 하늘로 뻗고 서 있었다.” 전환기의 한국에서 게일이 말한 대로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혀 피할 수 없었다.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그것을 떨쳐 버리고 도망하느냐가 당면한 문제였다. 몇몇 사람은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전보다 더 극심한 비탄의 상태, 곧 영혼의 죽음과 얼굴에 깊은 골이 패진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그래서 이들 수백 명은 무시무시한 공포감으로 함께 모였다. 심판날이 임했고,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몸부림치고 날쌔게 피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죽음 외에 도저히 다른 길이 없었다. 설교의 외치는 소리 앞에 그리고 놀랍고 경외로운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 앞에 그들이 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베드로가 모여든 수천 명의 무리들에게 죄악의 회개를 촉구했던 것처럼 이 영감의 순간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 모인 군중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길선주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유일한 말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길선주의 설교를 들은 그 현장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일의 말대로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얍복강 언덕에서 천사와 함께 생사를 걸고 투쟁을 하는 것과 같았다.”조지 매큔(George McCune)이 1월 15일 선교본부의 브라운 총무에게 보고한 것처럼 이날 사람들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 자신들의 죄악들을 고백하고 통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선교사를 마음에 미워해 오던 한 장로는 공개적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간청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예배당 안의 모든 사람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심령이 가장 강퍅했던 사람이 놀랍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교회 집사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딸 하나를 독살했다고 고백했는데, 그것은 결코 전에는 고백하지 않은 죄였습니다. 곡산 선교구 조사는 그가 레크(Leck)를 위해 일할 때 그로부터 우리 돈으로 2달러에 달하는 총 4엔을 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 돈을 그레이험 리에게 가지고 와서 그것을 미국에 있는 레크의 아내에게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남편들은 새 아내를 얻기 위해 자신들의 아내를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증오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중 몇 명은 처가에 가서 아내들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게일이 표현한 대로 “기도의 물결이 운집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자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합류하여, 그들의 간구가 죄로 인한 탄식과 뒤섞였다. 그런 후 잠시의 막간에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어나 자비를 호소하며 영혼의 무거운 짐을 토로했다.”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감추어 둔 자신만 알고 있는 이“무시무시한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여인은 청일전쟁의 발발로 아이를 등에 업고 피난을 하다 무거운 아이를 업은 채 피난할 수 없어 아이의 머리를 나무에 부딪쳐 살해한 다음 도망한 것을 탄식하며 회개하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한 일본인의 휴대용 소책자에서 600엔(300불)을 발견하고는 주인을 찾아 돌려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다 탕진한 것을 회개했다.


수년 전 빚을 갚고 영수증을 받았으나 빚을 갚는 과정에서 진 빚을 다 청산하지 못하고 속인 일도 있었다. 또 한 사람은 과거 수년 전 자신이 너무도 몹쓸 행동을 하는 강도였음을 고백한 후 경찰에 자수하고 자진해서 구속된 일도 있었다. 그 현장에 있던 한 장로의 고백대로 “집회의 장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무시무시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은 옳고 진실되고 거룩하다는 감명을 주었다.”“이것은 회오리바람처럼 내게 되돌아와, 죄악의 공포로 마치 영생을 잃는 것과 같았다. 나는 도저히 피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면서 일어나 나의 부끄러운 죄악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손실들을 배상하기로 결심했다.”오순절, 그 현장에 있었던 방기창 목사는 2년 후 게일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곳에 계신 것처럼 대단한 표적과 기사였다. 도망갈 수 없었다. 나는 몇몇 사람이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다가는 탄식하며 뒤로 나자빠지는 것을 보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몇 가지의 해묵은 죄에서 자신들의 영혼이 벗어나기 위해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물론 선교사들도 모두 신비스럽고 무서운 권능에 사로잡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블레어 선교사는 “나는 지금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수백 명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회상했다. 블레어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한다:


내가 결코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님께서 만약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는 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와 같은 집회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공개적으로 그날 밤 고백되었다. 감정으로 인해 창백해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신이 괴로운 가운데 백보좌 앞에 서 있는 죄악된 심령들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신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교회사에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깊이 통회하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마다 회개와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에 나타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은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은 물론 평양대부흥운동보다 2, 3년 앞서 일어난 웨일즈의 각성운동이나, 라이알(Leslie Lyall)이 기술한 바, 반세기 후 중국 북경 학생들 가운데 일어난 복음주의 영적각성운동과 너무도 유사했다. 깊은 확신이 곧 현시되었고, 개개인들이 회개하면서 용서의 기쁨을 경험했다. 이것은 조지 래드(George Trumbull Ladd)가 혹평한 바, 단지 “강한 감정적 흥분”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한 강권적인 회개의 역사였다.


이날 성령의 역사 앞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집회가 열리는 동안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참석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통회하기 시작했다. 사경회 현장에 있었던 참석자들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고 구원의 충만함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개인적인 영적 경험이 이전에도 보고 되었고, 때로는 집단적인 영적각성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 사경회처럼 참석자들 모두가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동시에 경험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01년부터 감리교 신학반에서 영적각성이 있었고, 1903년 여름부터 하디를 통해서 여러 차례 회개와 통회의 역사가 나타났고, 얼마 전 1906년 가을 목포에서도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는 이전의 그 어떤 영적각성운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성령이 죄인들의 심령에 임하였을 때 그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회개가 나타났다. 이날 한 젊은이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숨겨진 자신의 죄악을 토로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는 한 인간 마음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간음, 증오, 아내에 대한 애정 결핍, 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몇 가지 죄들을 고백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흐느껴 울었고, 실로 그는 거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그가 흐느껴 울자 청중들도 함께 흐느꼈다. 우리 모두는 마치 우리 자신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선주는 베드로 사도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오순절 현장에 모인 이들을 향해“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외쳤던 것처럼 장대현교회 저녁집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성령께서는 통회하는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하셨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자 깊이 감추어졌던 어둠의 죄악, 죄악의 광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날 성령께서는 각자의 은밀한 죄악의 치부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다. 평양대부흥운동은 과거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제 1차 대각성운동 때처럼 성령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면의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완전히 드러내셨다.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가 관찰한 대로 평양대부흥운동의 특징은 철저한 회개였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감추어 놓고 있으면 못 견디게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종종 바닥에 뒹굴거나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역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계속되었다. 또 전 회중은 통성으로 크게 기도하였으며, 함께 울고 기뻐했다.”


1월 15일, 화요일 저녁집회에 선교사들은 놀라운 성령강림의 역사에 놀라 참석한 청중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상의할 정도였다. 성령의 부으심을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한국교회를 축복하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그 강한 성령의 역사에 당황했던 것이다. 모든 참석한 선교사들은 급히 강단에 모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드디어 찬송을 불러야 했는데, 그것은 그들 중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험 리 선교사가 찬송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조용하게 진정되었다. 찬송 부르는 동안 잠시 조용해졌지만 또다시 회개가 시작되어 새벽 2시까지 그 상태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은 바닥에 엎어져 흐느끼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한국의 형제들을 일으키며, “형제여,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며 위로해 주었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가 밝힌 대로 과거 죄악의 공포를 깊숙이 깨닫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이번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의 무서운 결과,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을 통회했다. 그러나 단순히 통회로만 끝나지 않았다. 스왈른이 증언한대로 평양의 오순절“그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왔다. 도둑맞은 돈도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전반적으로 바로잡혀졌다.”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제임스 게일이 표현한바“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인” 이 같은 영적 변화는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장대현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평양 시내 전역, 더 나아가 한국교회 어느 곳에서나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양에서 열렸던 열흘 동안의 북장로교 선교부의 사경회가 끝난 다음 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다른 교우들에게도 전해 주었다.“이 소문이 각처에 전파됨에 따라 신령한 체험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는 지방 신자들의 마음속에 간절하여졌다.”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2007)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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