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의 영향은 평양과 서울, 대구, 청주 등 큰 도시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구석구석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이와 같은 분위기라면 1907년 12월 10일부터 시작되는 재령 선교지부의 황해 지방 남자 사경회에는 “약 1,000명이 등록할 것으로 예상될 만큼” 부흥운동의 열기는 전국 어디서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사경회 참석률과 열의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뜨거웠다. 남장로교 선교사 해리슨이 전주에서 50명이 모인 가운데 3주 동안 가졌던 정규 사경회(Normal class), 또 170명이 참석한 남자 성경 사경회(Men’s Bible Class)는 지난해에 비해 두 배 이상 참석자가 늘어났다. 만약 사경회가 “좀더 편리한 시간에 모였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졌을 것이다.” 여자 사경회(Women’s Bible Conference)에도 70명이 참석했는데 이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그리고 선교부 사경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각 교회에서 조사들이 한 주간씩 인도하는 사경회도 참석률이 높았다.
그 즈음 단기 전도여행을 다녀온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테이트(L. B. Tate)는 전도여행 동안에 78명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 두 곳에서 봉헌예배를 드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은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일들이었다. 학습교인들과 세례 지원자가 부흥운동이 시작되면서 거의 예년에 비해 배가 증가하였다.
교회성장과 더불어 전도열도 놀랍게 증가해 은혜를 접한 이들이 더 많은 시간을 전도하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서약하면서 작정된 날연보가 어느 때보다도 증가하였다. 1907년 3월 클락 선교구의 경우 117명이 무려 2,018일의 날연보를 작정해 한 사람이 평균 17일을 서약했다. 런던 타임즈(London Times)에서 영국의 윌리엄 세실 경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의 역사는 웨슬리 부흥운동의 성령강림과 유사한 데가 많았다:

웨슬리의 일기를 읽고 평양에 나타난 성령 강림의 기사를 비교해 보면 이 두 현상이 아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사건에는 비상한 권능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으며, 신자들은 이성보다 다른 힘에 의하여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깨닫게 하시는 그 성령의 권능(the power)이 자기의 죄를 이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확신시키는 힘(strength)을 그들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이 초기 부흥회에 참석하였던 한인들은······웨슬리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전도에 나서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기독교의 빛을 동양에 비추게 하는 과업은 한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 한국 개신교 선교지를 대변하는 KMF 1907년 10월호는 한 해 동안의 각성운동으로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기사들로 가득 차 있다. 부흥운동이 전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7, 8월 이후부터 구체적으로 그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평양과 서울과 기타 전 지역의 교회마다 밀려오는 새 신자들과 모여드는 기성 신자들로 차고 넘쳤다. 한국에 대형 교회가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한국은 큰 규모의 교회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07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서울 연목걸 장로교회에는 1,500명이, 정동 감리교회에는 1,100명이 모이고 있고, 평양에는 1,000명 이상 모이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 “평양 시내는 급속하게 기독교화”되고 있고, 그곳의 모든 교회마다 건강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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