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족적인 3.1운동과 기독교의 역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움직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서울, 평양, 정주 세 곳이 3․1운동의 중심지였고, 종교적으로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손병희, 최린,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이, 평양에서는 김선두, 변인서, 도인권, 이덕환이, 정주에서는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독립운동을 일원화할 것,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비폭력으로 할 것 등 독립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기독교 측과 협의를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1919년 2월 상순, 실무를 맡은 최린은 중앙학교장 송진우의 집 거실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과 회합을 갖고 독립선언서 의견서 및 청원서를 작성키로 했는데,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고,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등 구한말 지도자들과의 교섭은 최린, 최남선, 송진우가,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교섭은 최남선이 담당키로 했다.


이들은 지역과 종교를 초월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이승훈으로 알려진 이인환을 통해 기독교 측과, 한용운과 백용성을 통해 불교 측과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2월 21일 최남선은 이인환을 방문하고 독립운동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그 전날 밤 박희도(朴熙道) 집에서 기독교 동지들이 회합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종교의 같고 다름을 불문하고 합동하는 것이 좋다는 취지를 극력 설파하여 합동할 것을 요구하자 이인환은 동지들과 협의한 후 그 가부를 회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이인환, 박희도, 오기선, 오화영, 신흥식, 함태영, 김세환, 안세환, 현순 등 개신교 측 지도자들은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이갑성의 집에서 천도교 측과의 협력문제를 상의했고, 이 문제를 위임 맡은 이인환, 함태영은 2월 24일 최린을 찾아가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통보했다. 이인환, 함태영은 최린과 만나 독립운동의 거사 일을 고종의 장례로 수십만의 민중이 경성에 모여드는 국장일 전전일인 3월 1일 오후 2시로 정하고 이날 2시에 파고다 공원에서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측 16인, 천도교 측 15인 그리고 불교 측 2인, 합 33인이 구성되었고, 그 대표를 손병희가 맡았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전국적인 연락활동은 남녀 학생들이 맡았다. 일제의 무력 탄압정책으로 모든 사회적 유대가 단절된 가운데서도 “민족의 집단적 보루”는 종교단체와 학생집단이었다.


3․1운동은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대로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과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 2만 명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의 의사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파고다 공원에는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가 휘날렸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서울 전역으로 메아리 쳤고, 고종의 장례일을 앞두고 서울에 모여든 군중은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의 행진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심지어 진압을 하려던 상당수 한국인 순사들도 자신들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시위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이 서울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같은 시간에 평양, 진남포, 안주와 의주, 선천, 정주 등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독립을 염원하는 군중의 만세 소리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평양에서는 숭실학교 교수, 졸업생, 재학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평양에 주재하던 몇몇 선교사들은 예정된 장소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거의 모든 학생들과 많은 공립학교 학생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은 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시위를 담당한 한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총 2,021,448명이었고 시위운동의 모임도 1,542회에 이를 정도로 3․1운동은 한국인들의 독립의지가 전국적으로 결집된 대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시위에 가담한 이들은 농민, 학생, 지식인, 상공업자,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직업도 교사, 의사, 회사원, 승려, 목사 등 거의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다 참여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 비록 기독교는 그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단히 강력하였고, 민족 종교와도 같은 힘을 지니고 지식인이나 민중 깊숙이 영향을 주었다.” 김양선이 지적한 대로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개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 1회 만세 시위처가 모두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시위 역시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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