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03월 01일 /3.1 운동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역사 이래 가장 장엄하고도 뜻깊은 3.1 운동이 발생했다. 이 운동은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던 1776년의 미국 독립혁명이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3.1 운동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은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톨릭과는 달리 3.1 운동은 종교를 초월해 민족의 미래를 염려한 독립운동이었다. 기독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 불교 대표 2명등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은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중요성을 지닌다. 파고다 공원에서 태극기를 손에 든 수천 명의 군중들이 감격에 벅차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행진하고 있던 거의 같은 시간 평양, 선천, 원산, 의주 등 여러 도시에서도 동시에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3.1 운동은 단일 민족의 단일 의지를 대외에 천명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을 송두리째 말아 삼키려는 일제의 침략적 찬탈에 대한 민족적, 종교적 항거였다.

일제는 정치, 경제, 문화, 사상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처음부터 용의주도하게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통해 침략의 토대를 마련했고,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모든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서는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3. 1 운동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3. 1 운동은 민족적 힘을 종교인들이 집약시켜주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인들이 종파를 초월해 민족적으로 결집한 예는 세계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민족적, 종교적 응집력을 기독교인들이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청교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가 근대에 들어 민족주의 색깔을 강하게 반영하기 시작했다. 주로 미국 청교도 후예들에 의해 복음이 심겨진 한국 기독교는 복음과 함께 근대 서구 민주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과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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