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03월 01일/한국인에 의한 첫 세례


1908년 3월1일 영계 길선주 목사가 세례식을 집례함으로써 한국인에 의한 첫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1908년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그 이듬해이자 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지 1년째 되는 해였다.

첫 세례식을 집례한 길선주 목사는 1907년에 조직된 첫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최초의 일곱 명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며, 평양 장대현교회를 무려 20년간이나 담임했고, 1907년의 평양 부흥운동의 불꽃을 점화, 확산시킨 대각성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만 번 이상 설교했고, 3백 80만 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3,000명 이상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무려 60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한국 신학을 결정"했던 인물, 부흥운동의 대변자, "보수주의 신앙의 거성"이라는 현대인의 평가는 길선주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국 개신교가 막 시작하려던 1869년 개화기에 태어난 영계가 한국선교  50주년이 갓 지난 1935년, 한국 개신교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주님의 곁으로 떠나자 Charles F. Bernheisel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는 가장 탁월한 지도자이자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했다. 실로 영계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인물이었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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