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 03월 07일/아퀴나스 서거

1274년 3월 7일 중세 기독교 지성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리용 공의회에 가는 도중 포사누오바의 시토 수도원에서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a)의 저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아퀴나스는 어거스틴과 칼빈 사이에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1224년 이탈리아 상류층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퀴나스는 14살 때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학문 연구에 일생을 투자한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사상 정립의 도구로 정착시켰다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의 방법론을 통해 신학을 집대성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지성에 존재하는 것 치고 먼저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확신에 기초한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본유관념론과 안셀름의 본체론적 논증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험주의에 충실하였다. 안셀름이 신플라톤주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존재는 감각이나 이 세상의 관찰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에 관한 관념 자체의 탐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라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로 옮겨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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