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03월 10일/숭실대학 인가

1910년 한일합방 이전 한국의 유일한 최고 학부였던 숭실대학이 1912년 3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본래 1897년 평양신양리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출발한 숭실학당은 1906년에 감리교 선교회가 합류하면서 협성숭실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했고, 그리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정식 학부 인가를 받은 것이다. 숭실대학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한국의 기독교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는 장감이 교파를 초월하여 조선 젊은이들의 고등교육에 뜻을 합하였다는 사실이다. 학교 명칭도 교파적인 색갈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Union Christian College로 불렀다. 숭실은 북쪽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둘째는 전환기에 선 조선의 장래를 짊어질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기독교 문화 창달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1918년부터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되기까지 숭실은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젊은이들을 상당히 배출했다. 청년 박형룡이 이 시기에 숭실에서 교육받고 금릉대학에 유학했던 것은 전형적인 예이다. 셋째는 비록 학교가 폐교되는 쓰라린 아픔을 경험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의 압력과 회유 속에서도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국교회를 지도하는 데 적지 않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숭실대학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 전체에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탁월한 지도력의 소유자 제 2대 교장 사무엘 마펫(1918-1928)과 불굴의 신앙인 제 3대교장 죠지 맥큔(1928-1936)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용규 교수(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 총신신대원 역사신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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