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스쿨에서의 성령의 역사


그러나 이보다도 더 강한 성령의 역사가 평양 시내의 미션스쿨과 성경학교와 신학교에 임했다.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5월, 베어드(W. M. Baird)의 아내 앤 베어드(Annie A. Baird)는 코리아 미션 필드에“평양학생들 가운데의 성령의 역사”라는 기사를 통해 얼마나 놀랍게 성령의 역사가 평양숭실대학과 숭실중학교 학생들 가운데 나타났는가를 증언해 준다.“기숙사에 거주하는 몇몇의 학생들은 매우 놀라운 체험을 경험했다. 종종 며칠 동안 계속되는 무시무시한 죄의 탄식 후 용서, 평안의 느낌, 대단한 기쁨이 찾아들었고, 중보기도 가운데 권능의 세례가 찾아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숭실대학교의 북감리교 선교사 베커가 1907년 2월 개학하자, 성경 사경회에서 있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는 움직임이 교수들 가운데 있었다고 언급한 다음과 같은 사실과 일치한다:


……학교가 개학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 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 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에만 노력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들까지……죄를 회개하고 애통했다. 한때 내가 세어 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 시간 서 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약 십 분의 구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인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다.


미션스쿨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웠던지 “심지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울면서 그들의 잘못을 서로 나누느라 수업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평양의 여자 성경학교나 신학교, 평양의 감리교회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이어졌고, 3월에는 장로교 여자 사경회와 4월에는 평양장로교신학교에서도 일어났다.


확실히 1907년 전반기 평양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성령의 “특별한 축복”이 임하는 부흥의 계절을 맞고 있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평양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평양 시내 미션 스쿨은 부흥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부흥운동의 중심에 학교가 있었던 웨일즈 부흥운동, 미국의 2차 부흥운동, 무디 부흥운동, 오순절부흥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부흥의 불길이 제일 먼저 강타한 곳이 평양 시내에 있는 여러 미션 스쿨이었다. 숭실대학에 이어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장로가 재학하고 있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장대현교회에서 발화한 평양대부흥운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년에 3개월 씩 집중적인 신학교육을 받는 전통에 따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학생들은 1907년 3월 말부터 시작되는 신학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전체 신학생 75명 가운데 길선주를 비롯한 7명은 4월부터 6월까지 마지막 3개월의 과정을 마치면 금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지난 7년 동안 꾸준하게 1년에 3개월씩 신학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 전 신학교가 위치한 평양에서 그것도 그 학교 학생과 교수들을 통해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이 발흥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로서 대단한 축복이었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장로교 목회자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이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시려는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각성의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가운데 열린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수업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진지해졌다. 이들 중 절대다수는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놀라운 영적각성운동과 이어 지난 2월 평양숭실대학 학생들 가운데 임했던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소식을 이미 보았거나 듣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신학생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선교사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장로교 독노회 결성을 앞에 두고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무장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길선주 장로를 통해 그 가능성을 자신들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평양신학교 개강 사경회에서도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이 임했던 것이다. 신학교육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그때에 죄를 고백하고 사죄와 능력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축복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길 장로와 같은 몇몇 사람은 서울과 평양 모두에서 놀랍게 주님의 쓰임을 받고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지방 사경회에서 유사하게 주님의 쓰임을 받고 있었다.”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해 평양 시내로 다시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던 영적각성운동의 “어떤 특별한 축복”을 아직 체험하지 못한 이들이 이번 개강사경회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강 첫 주 저녁 마다 열린 사경회는 신학생 모두에게 축복된 기회였다.

 

3월 30일 전국교회가“평신(平神)의 날”로 정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위해 기도할 만큼 평신은 전국교회가 깊은 관심을 갖고 후원하고 있었다. 신학교의 영적훈련은 한국교회가 바라는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이었고, 실제로 1906년 가을 신학연구위원회에서는 신학교 3개월 수업 기간 동안에 매일 저녁 1시간 씩 특별기도회와 심령사경회(spiritual conference)를 갖기로 결정했다. 민족적 위기 앞에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살리는 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무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월 2일 화요일, 첫 수업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개강사경회를 개최한 것이다.


선천의 로스(J. Robert Ross), 서울의 샤프(C. E. Sharp), 사이드보텀(Richard H. Sidebotham), 스왈른 등 그 해 강의를 맡은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이들 신학생들에게 즉각적인 은혜의 강림이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신학생 중에 이미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아직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성령의 역사가 인위적인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이 평양신학교 학생들 가운데에도 놀랍게 임하도록 간구하기 시작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인 첫 날 저녁 기도회는 특별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첫 주 내내 매일 저녁 기도와 회개의 시간을 가졌다. 신학생들은 너무도 진지하고 너무도 간절하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를 열망했고, 실제로 성령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외면하시지 않으셨다. 그 결과 매큔(G. S. McCune)이 기록한 대로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이 사람들은 성령의 불로 그들의 죄가 모두 태워져 버렸음을 체험했다.”1907년 북장로교 선교회 평양 선교부가 보고한 대로“한국 전역에서 교회의 사역을 비우고 온 신학교 학생들이 학기가 개강하는 그 주간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 저녁집회는 열정적인 기도로, 때로는 개인들의 인도로, 그리고 다른 때는 모두가 연합한 통성 기도로 매우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처음 시작부터 이전에 언급되지 않은 극악한 죄악들이 고백되어졌다. 이 고백들은 비록 죄의식의 증거로 특징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첫 주를 지나면서 집회는 죄의 확신에 대한 강도에 있어서 분명한 진전이 나타났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였다. 이전에 고백한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탄식으로 울부짖으면서 더 비통한 죄책감에 대한 새로운 기회를 발견했다.


거의 매일 밤 은혜가 임했다. 4월 6일 토요일 밤 집회는 심야까지 계속되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에 숨겨져 있던 기만, 교만, 속됨, 간음, 탐욕, 증오, 질투, 그리고 사실상 마귀의 범주에 속한 거의 모든 것들을 드러내시며 놀라운 권능으로 임하셨다. 4월 8일 월요일에는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자 신학생들과 교사들은 그날 낮과 저녁 온 하루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보냈다. 많은 사람들은 회심 전에 지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자신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고 느꼈고,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주실 때까지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4월 9일 화요일에도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곧 비상한 기도의 몸부림이 있었고 이어 아직 숨겨진 내면의 죄악들을 고백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의 죄의 짐으로 짓눌렸으며, 고백하고 평안을 소유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의 짐으로 짓눌렸다. 이 사람들이 절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들으면 그들의 심령에 성령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날 저녁에 찬양과 감사의 간증이 있었다. 간증자들은 간증을 간단하게 하도록 요구되었다. 약 한 시간 동안 전에 좀체 들어 보지 못한 5, 60명의 진지하고 기쁨에 찬 간증들이 있었다.“그 중의 몇은 성령께서 신학교 개학 날 집회 동안에 그들에게 행하신 것을 간증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뜨거운 기도, 간절한 외침, 강권적인 회개의 역사가 모인 이들 가운데 간단없이 계속되었다.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죄를 불태워 버리는 성령의 불(the fire of Holy Spirit)을 경험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평양신학교 학생들은“일찍이 가져 보지 못하였던 신앙의 힘을 체험”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능력 있게 주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들을 준비시키신 것이다.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어 장로교를 초월 남산현교회를 비롯한 평양시내 전역으로 그리고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로 확대되는 성령의 역사를 목도하면서 신학생과 교수 모두 이것이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한 한 가지는 “성령께서 이 시대의 사역에 그의 영을 부어 주셨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맡겨진 일에 충실하다면 그가 더 큰 축복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의 서치라이트가 인간의 영혼을 비출 때 죄는 참 모습을 드러낸다. 성령의 조명으로 이 사람들은 매우 부정하고 행함이 없고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그런 후에야 자비에 대한 간구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친히 실제로 경험을 한 자만이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이 집회가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처럼 사악한 심령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수는 없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차례 혹은 또 한 차례씩 고백하면서 그날 저녁은 찬양과 감사로 드려졌다. 이 저녁 또한 아주 놀라운 집회였다. 하나 둘씩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 간증하여 75명의 신학생들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받은 평안에 대해 기쁨에 찬 간증을 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임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목도한 번하이셀 선교사가 브라운에게 보낸 1907년 4월 13일자 편지에서 밝힌 대로 부흥운동을 통해 “교수들과 학생들 모두의 과업이 매우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과거 신학생들은 신학교육을 통해 교리적인 구원과 죄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지만 이번 개강사경회를 통해 구원의 은혜, 십자가의 놀라운 구속의 사랑과 용서, 말씀과 기도를 통한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몸소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 영적으로 무지했던 이들이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 비해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서서히 교회의 민족적 책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민족적 책임의식은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결실이었다. 이전에 비해 신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더 진지해 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령의 충만이 인생관의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수업태도까지 바꾸어 준 것이다. 성령 충만은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나 장차 목회자가 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요구였다. 그리고 스왈른이 보여주듯 성령의 역사를 목도한 평양장로교신학교 교수들은 주께서 장차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제 우리는 안수를 받고 한국교회에 목회자로 자리를 잡아야 할 첫 목회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이것이 한국교회의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의 경우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청일전쟁, 을사조약, 고종 하야 등 국내외적으로 이 민족이 가장 힘든 고통의 세월을 경험하는 이때 이 민족은 유사 이래 가장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경험한 것이다. 더구나 첫 목회자들을 배출하고 독노회를 조직하기 바로 전에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볼 때 대부흥운동은 참으로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평양대부흥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곧 평양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우리는 부흥운동의 역사가 평양의 어느 특정 교회, 특정 장소, 특정 교파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평양 전역이 부흥운동의 중심권에 있음을 주목한다. 평양 시내의 교회들과 평양 시내의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 더 나아가 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에 이르기까지 놀랍게 확산된 것이다:


그 도시의 교회들, 각종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들, 시골 지역에 있는 교회들, 시골에서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대학생들과 중학생들 모두가 동일한 체험을 했으며, 똑같이 처절하게 죄를 자각하고 몸부림치는 기도 가운데 번민하다가 마침내 모두가 평안과 기쁨을 체험했다. 그 도시의 직분자 훈련 모임에서, 여성 성경학교에서, 신학교와 남자 성경학교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3개월이 지난 1907년 4월에도 평양 전역에서는“은혜의 소낙비가 계속되고 있었다.”한때 소돔의 도시로 불리던, 영적으로 가장 희망이 없던 기생의 도시 평양이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 놀랍게 달라져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지금은 어디서나 기도 소리와 통회와 찬송 소리가 들렸다.”평양선교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여 선교사 베스트(Margaret Best)는 부흥운동을 통과하면서“평양이 점점 더 기독교 도시로 바뀌고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독교 도시로 바뀌고 있다는 베스트의 고백은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불신앙이 서서히 사라지고 도시 전체에 영적인 변화들이 목도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과거 희망이 없던 도시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더 나아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의 역동성이 생명력 있게 파고치는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형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그 말씀을 통한 영적각성이 도시 전역에서 일어나고, 영적각성을 통한 변혁의 역사가 서서히 도시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장대현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 평양의 영적 여명을 알리는 소리였고, 불신의 이 민족이“회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회복하여 바르게 살 것을”촉구하는 종소리였다. 이렇게 해서 한때 불신앙의 도시, 불과 수년전만 해도 포성이 끊이지 않았던 도시가 한국의 영적각성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이 얼마나 인간의 심령뿐만 아니라 지역과 사회를 바꾸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1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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