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통한 세스페데스신부와의 첫 접촉

포르투갈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정치․군사 면에서 놀라운 혁명이 일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해상 교류를 통해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된 신무기는 일본의 군사력을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이와 같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16세기 중엽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을 통일하고, 오다의 뒤를 이어 통치권을 장악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통치권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1592년 임진왜란, 1598년 정유재란이라는 두 차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단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일본 전국을 정복하고 나자 “그 이름을 영원히 전하려는 욕심”이 생겨났고, “신으로 제사를 받기에 족한 공로를 세우려는” 야욕으로 불타올랐다. 1592년 4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진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18,700명의 부대를 시작으로 수군(水軍) 규오니 요시다카(九鬼義隆)의 9,450명의 부대를 포함 10개의 부대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시작된 임진왜란이 조선기독교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와 더불어 예수회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 잡혀간 전쟁 포로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고 심지어 이들 가운데 순교자까지 배출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수회의 활발한 일본 선교에 힘입어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 침략의 선봉장 중 한 사람인 고니시 유끼나가(少西行長)도 기독교인이었다.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사제 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 예수회 일본부관구장 고메스(P. Gomez) 신부는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을 조선에 파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그의 라이벌 장군이자 철저한 불교 신자인 카도오키 요마사(加藤淸正)의 참소로 대단한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더 이상 병졸들을 대상으로한 예수회 선교는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세스페데스는 부임 1년 만에 조선을 떠나야 했다.
웅천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하던 세스페데스는 얼마 머물지 못하고 고니시의 조언을 받고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년 동안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을 뿐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권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3.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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