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와 서울에서의 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서울이었다. 1월 14일과 15일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길선주를 통해 서울에서도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2월 17일부터 승동교회에서 열린 서울장로교 연합 사경회 때 길선주가 모인 무리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민첩하고 능력 있고 두 날을 가진 검보다도 더 예리했다. 그의 기도는 놀라웠다. 사람들은 무거운 죄짐으로 고꾸라져 울부짖었다. 때때로 거의 전 회중이 눈물범벅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성령의] 역사는 기성 교인들 가운데 있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시무시한 죄를 지었음을 고백했다.

회개를 촉구하는 길선주 그의 모습 앞에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다. 그의 처음 부흥운동에 대해 그렇게 냉소적일 수 없었던 이창직도 길선주와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에는 태도가 달라져 길선주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는“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가 그렇게 180도로 태도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길선주를 옆에서 지켜보고 또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직접 참석하고 나서부터였다.“그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을 설교하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선지자의 말과 같아서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왼쪽 마포삼열, 가운데 길선주, 오른쪽 이길함


길선주를 논하지 않고는 평양대부흥운동을 논할 수 없고, 또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가 얼마나 평양대부흥운동의 저변 확대에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그의 설교가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는 한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1907년 한국의 대부흥운동 때에 길 목사는 평양과 다른 선교부 모두에서 놀랍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청중들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어떤 국적의 사람을 좀체 만나 보지 못했다. 그의 음성은 달콤하고 그의 예절은 사람을 사로잡았으며, 그리고 그는 놀라운 설득력을 가지고 심령에 호소해,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막 웃다가 울다가 엄청난 죄의 확신으로 전율했다.


그만큼 그의 메시지는 능력이 있었다. 연이어 길선주는“勝洞, 蓮洞, 水口門, 尙洞, 諸敎會에서 集會”를 인도했고, 그가 인도하는 서울 집회마다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급부상한 그의 명성을 듣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회마다 예외 없이 성령의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同年 春에 京城 各 敎會가 復興하다 平壤 敎會 吉善宙 長老가 京城에 來하야 京畿道 査經會에 聖神道理를 敎授할 時에 聖神의 感動을 밧아 各其 罪를 自服하고 哀痛하며 重生의 洗禮를 밧앗고 熱心히 傳道하야 道內 各 敎會가 크게 復興하니라.

 

확실히 길선주의 설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다. 마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의 베드로의 설교처럼 그의 설교는 대단한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길선주가 인도하는 일련의 서울 전도집회에서 1,200명이나 결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서울 집회가 얼마나 놀라운 집회였는가를 말해 준다.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2007)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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