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근교 지역(선천, 해주, 영변, 칠산, 재령)의 부흥운동


선천, 해주, 영변, 칠산, 재령을 비롯한 평양 근교 서북지역은 평양대부흥운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길선주와 더불어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의 주역 이길함 선교사를 통해 평양의 부흥의 불씨가 선천으로 옮겨져 부흥운동은 선천의 “교회와 선교부의 삶에 아주 깊이 영향을 미쳤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선천으로 옮겨진 것은 그해 2월이었고,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겨울 남자 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2월, 그레이험 리를 주강사로 1,18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린 선천과 의주의 겨울남자 사경회 저녁집회 동안에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레이험 리가 주 강사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 지역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1907년 북장로교 선천 선교부가 기록한 대로 그가 인도한 사경회 동안에 “교회가 수개월 동안 기도하여 온바 하나님의 능력이 현시되었다.” 그것은 1907년 3월 3일 컨즈(C. E. Kearns)가 말한 대로 숨겨진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였다. 역사 속의 부흥운동이 그런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부흥운동의 지도자, 그레이험 리를 통해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부흥의 불길이 확산된 것이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가 밝힌 선천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과 너무도 유사한 영적각성운동이었다:


비록 충분한 설명을 여기서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올해 경험한 영적 각성, 너무도 깊이 교회와 선교부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는 교회 사역에 대한 보고를 마무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2월 이길함 선교사의 선천 선교부 방문에 그 영예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때 부흥운동의 출구가 열리고, 교회가 몇 개월 동안 기도해 왔던 바대로 하나님의 권능이 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고통과 어려움은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이지만, 교회가 죄의 고백으로 순결해졌으며, 죄의 통회로 힘을 얻었으며, 사랑의 영의 지배로 더 높은 차원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은 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흔들리는 여인들에게 도덕과 순결의 삶을 가져다주었다.

선천과 의주의 겨울 사경회 기간 동안 집회가 남녀를 위해 매일 열렸고 늦은 밤까지 죄의 고백이 계속되었다.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혔고, 도둑맞은 돈이 되돌아왔으며,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중생에 대한 확신을 갖기를 기도했다.


이처럼 선천과 의주의 겨울 사경회 기간 동안 나타난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평양대부흥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회개를 동반한 영적각성운동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선천 지역이 이와 같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길함 선교사의 영향이 컸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이길함 선교사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의 불길을 그곳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해주에서도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부흥의 불길을 전해준 사람은 평양에서 열린 감리교 신학회(theological class)에 참석하고 영적각성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1907년 6월, 북감리교 연회에서 크리체트(Carl Critchett)가  밝힌 대로 “평양에 갔던 사람들이 놀라운 은혜를 받고 돌아와 자신들의 고향 교회와 이웃 마을에 부흥의 불을 전한 것이다.”해주지역은 서북 지역 치고 영적 상태가 그리 높지 않아 처음 부흥운동에 대한 반응은 미진했다.


그러던 이 지역에 부흥운동에 불길을 당긴 사람은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던 곤미 교회 담임 목사였다. 평양에 가서 은혜를 체험하고 돌아온 그는 어머니를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는 일곱 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해주교회에도 평양에서와 같은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으셨다. 그 다음날 수요기도회 시간에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죄의 고백이 나타나 수요기도회에 참석한 남녀 모두가 큰 은혜를 경험했다:


이 삼일 설교 후 회개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임하여 남자, 여자, 어린아이 모두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심령으로 부르짖으며 공개적으로 그것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한 죄로 인한 애타는 투쟁과 몸부림과 절규를 나는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다. 성령이 확신과 구원의 능력으로 임재한 것이다.


곤미교회 성령의 역사는 그날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하고 더 놀랍게 임하기 시작했다. 존스(George Heber Jones)는 이렇게 증언한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갑자기 마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예배드리는 이들 위에 임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압도되었다. 그 교회의 한 권사는 가장 은혜를 많이 받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권사는 자기 죄를 고백하는 동안 마치 일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그 일로 사람들이 대단한 경종을 받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죄 용서와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교회의 거의 모든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경험할 때까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부흥운동의 역사가 그렇듯이 곤미교회의 영적각성운동과 영적변화는 한 교회의 변화로만 끝나지 않았다. 곤미 교회 담임목사는 다른 마을의 교회에서도 집회를 인도했고, 그 때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말씀을 통한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해주에서도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평양의 부흥의 불씨를 해주 전역으로 가져다 준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순식간에 영변에까지 확산되었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변은 평양교회의 영향을 직 간접으로 받아왔다. 이번의 성령의 역사, 부흥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블레어가 1906년 11월 조사를 데리고 와서 열었던 사경회와 그해 12월 평양에서 있었던 감리교 신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감리교 지도자들, 그리고 1907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영변교회 성도들이 이 일의 주역이었다.


해주와 마찬가지로 영변 지역 역시 한국인들에 의해 영적각성운동이 저변확대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저변확대에 중요한 몫을 했지만 모리스(C. D. Morris)가 고백한 것처럼,“이 대부흥운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곳에서, 한국 형제들이 부흥회를 전적으로 책임 맡아 인도했을 때 가장 커다란 결실들이 맺혔던 것처럼 보인다.” 영변 지역의 부흥운동은 영변의 미국인 광산에 종사하는 광부들에게까지도 확산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의 불길은 칠산에까지 도달했다. 부흥운동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한 후 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는 한 층 성숙했다. 1907년 6월 케이블(W. A. Cable)이 보고한 대로“현재 칠산 지역 사역의 두드러진 특징은 교인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영적인 능력이었다.”“겨울 부흥운동이 이 지역에 임해 오래된 교인들의 영적인 삶이 놀라울 정도로 깨어나고 있었다.”영적으로 깨어나면서“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혼구원 문제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은 윌리엄 헌트 선교사가 맡고 있던 재령에서도 일어났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재령 선교부가 부흥운동의 역사를 공유 1907년 북장로교보고서에“최고의 해”로 기록될 만큼 놀랍게 교회가 성장했다. 재령 지역의 경우 특히 재령 시내 교회가 부흥운동을 통해‘급성장’을 이룩했다. 부흥운동의 불길이 널리 확산되면서 각 지역마다 죄의식이 더 깊어졌고, 기도의 영이 더 강해졌으며, 지금까지보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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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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