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의 의의

교회사적으로 볼 때 알케스트 호의 맥스웰과 리라 호의 바실 홀 일행의 서해안 탐사는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것은 바실 홀과 맥레오드가 조선서해안 및 류큐 열도의 항해기를 비롯한 서해안 항해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유럽 전역에 널리 소개했기 때문이다. 또한 맥스웰과 바실 홀은 조선에 대한 지리적인 탐사, 해안 탐사를 통해 해도를 작성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 너무도 중대하고 소중한 일을 감당했다. 이미 하멜을 통해 조선의 물정이 서양에 알려진데다 구체적으로 조선이 동양의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떻게 선박이 항해할 수 있는지 해도가 그려져 소개되었다면, 비록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열지 않았더라도 이미 조선은 세계에 그 정체의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문화 교류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해도 작성이라는 면에서 고찰한다고 해도 “그들의 조사 사항은 종교 및 문화사적 견지에서 볼 때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영국의 탐험대가 미치지 못한 서해안 일부에 대한 정확한 탐사가 이루어지고 해도 작성도 완성되어 이 지역 항해의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서해안에 대한 항해도(航海圖)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Du Hald(교수님께 확인)의 지나제국전지(支那帝國全誌 1735)가 있었으나 이것은 실측에 근거해서 만든 것이 아니어서 바실 홀이 작성한 해도와 비교할 때 지형과 위치 상 많은 오류가 있다. 실측에 근거한 답사로는 1797년 페로우스(De la Perouse) 대령의 동해안답사와 1804년 브로톤(W. R. Broughton)의 남해안 답사가 있었으나 서해안의 해도 작성은 맥스웰과 바실 홀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작성한 해도는 서양 과학 측정기술을 도입한 것이어서 상당히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귀츨라프가 1831년과 1832년에 요동만, 조선 서해안, 유구항해, 1846년과 1847년의 불란서 군함의 외연도 및 고군산도의 내항에 이르기까지 모두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해도에 의존한 항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바실 홀 대령은 자신들이 작성한 해도가 “항해용 경선의(經線儀)와 아울러 천측(天測)에 의하여 보정(補正)된 목측도(目測圖)보다 더 나을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바실 홀이 그의 항해기 마지막에 해도를 첨부하면서 “이 해안을 따라서 항해한 우리의 경로를 그려서 이 작품에 첨부했는데 앞으로의 항해자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매우 바쁜 가운데서 작성되었으므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나 지금까지 발표된 어떤 지도보다도 정확할지 모르는 일이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김양선 목사가 지적한대로 이 해도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서해안과 아울러 요동만을 처음으로 세계의 국제공수로에 결부시켜서 그때부터 반세기 넘는 동안에 이 지방 항해의 길잡이가 된 공적은 감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계속 강행하건 말건 이 해도를 길잡이로 우리나라를 찾아온 상선 혹은 군함은 그 수가 날로 더해갔다.”
서방 세계에 조선을 소개하는데 맥스웰과 홀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홀 함장이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1817년 8월 11일 아프리카 서해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정박, 그곳에 유배되어 있는 나폴레옹을 방문해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직접 그린 조선의 풍경을 담은 풍속화를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바실 홀이 그린 그림 가운데 기다란 담뱃대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조선 노인의 그림을 손에 들고는 눈을 굴리며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스스로 “아, 아주 큰 갓을 쓴, 긴 하얀 턱수염의 이 노인!…참 보기 좋구나”를 되 뇌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선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바실 홀 일행은 조선의 문화를 서방 세계에 구체적으로 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해도가 훗날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기록한 항해기, 이들이 작성한 서해안 해도, 그리고 한 권의 성경을 조선인들에게 건네주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도전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칼 귀츨라프 선교사였다. 귀츨라프는 정확히 16년 후인 1832년, 1개월간 고대도에 체류하면서 복음을 조선인에게 심어주었다. 바실 홀과 맥스웰을 통해 서양인들을 접하고 서양문명을 접한 그 섬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실 홀의 방문과 그 일행이 남긴 이야기는 오랫동안 그곳 주민들 사이에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던 차에 다시 귀츨라프가 그곳에 도착해 한 달을 체류한 것이다. 귀츨라프 일행이 놀랄 만큼 후에 그곳 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그 일행을 맞았던 것도 이미 바실 일행과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스페데스의 입국을 통해 임진왜란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잔인한 전쟁의 사건이 복음의 접촉점이 되었고,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입국, 그리고 후에 바실 홀과 맥스웰 대령의 입국 역시 난파(難破)나 해도 작성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및 종교와의 접촉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진 박연과 하멜 일행이 조선에 입국하여 오랫동안 조선 사회 속에서 조선인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조선인 관리들과 접촉하고 비록 영어 성경이기는 하지만 한 권의 성경이 조선인의 손에 처음으로 쥐어 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사건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4.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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