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05월 13일/서재필 추방


기독교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요, 민권운동가요, 교육가요, 의료인이요, 그리고 기독교 청년 지도자였던 송제 서재필의 생애는 그의 경력 만큼이나 파란 만장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건너간 서재필은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10년 후 워싱턴대학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윤치호, 민영환, 이상재, 이채연, 유길준, 박정양 등과 민중의 계몽운동을 착수했다.
한편으로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거족적 민족계몽을 목표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문으로 국내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은 서재필의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전형적인 사례였다.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 민권운동을 전개하던 서재필은 1898년 5월 13일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다시 떠나야 하는 비운을 맞았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꺼질 줄 몰랐던 서재필은 실망하지 않고 미국으로 추방된 후에도 1919년의 3.1운동의 정당성과 을사보호조약, 통감정치, 한일합방, 105인 사건의 불법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전세계 여론에 폭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 장군의 말대로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과 번영에 전 생애를 투신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0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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