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을 통한 교회성장의 특별성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진행된 대부흥운동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의 성장은 몇 가지의 뚜렷한 특징들을 남겨 놓았다.

첫째는 1907년 이후의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이 그 이전과 비교할 때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1907년 이전에도 한국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또한 부흥운동이 선교지에서 분명하게 감지되었지만, 이것은 1907년 이후와 비교할 때 국부적이고 지엽적인 한계, 즉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1903년 하디를 통한 원산부흥운동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부흥운동의 움직임은 평양과 원산과 서울과 개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다 다시 이것이 몇몇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부흥운동은 전국적인 부흥운동, 그야말로 대부흥운동으로 폭발한 것이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장대현교회를 시발로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다시 전국의 주요 도시로 그리고 또다시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부흥운동의 불길이 널리 더 깊이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가장 두드러지게 저변 확대되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둘째는 모든 선교회에서 놀라운 성장이 이룩된 것이 사실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룩한 교단은 감리교 선교회 특히 남감리교 선교회였다. 하디의 회심과 그로 인한 남감리교의 원산부흥운동과 그 후의 하디의 활동으로 남감리교는 한국 부흥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록 1897년에 선교를 시작하여 한국에서는 아주 늦게 시작한 선교 단체였지만, 부흥운동을 계기로 한국에서 외형적인 숫자에 비해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선교 단체로 부상했던 것이다. 하디뿐만 아니라 후에 입국한 저딘이나 크램 모두 한국의 부흥운동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자연히 남감리교 선교부가 자리잡은 원산과 개성은 한국 선교지에서도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룩한 대표적인 부흥운동 중심 지역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셋째는 대부흥운동과 교회 성장과의 관계이다. 부흥운동이 교회의 성장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가지느냐 아니냐는 논란이 한국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부흥운동이 한국에 뚜렷한 성장을 가져다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903년부터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던 것도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이후의 백만인 구령운동 등 이와 같은 일련의 부흥운동과 맞물려 이룩된 결과이다. 일률적인 통계로 분석하여 결과를 산출하기보다는 특정 지역, 특히 부흥운동이 두드러진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부흥운동과 교회 성장은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넷째는 부흥운동이 교회의 교세의 성장뿐만 아니라 사역의 확장과 다양성, 그리고 사역의 확장을 불가피하게 초래해 단순히 교회 성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교세가 늘어나면서 교육열이 동시에 높아졌고,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학교가 세워지고, 자연스럽게 미션 스쿨이 발전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것은 의료 선교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병원이 설립되었고, 더 효율적인 의료 활동을 위해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한 한국인 의사를 배출해 부흥운동 기간 동안 한국 선교지에서의 의료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교 사역의 확장과 다양성은 부흥운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실제적으로 1903년 이후, 좀더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일전쟁 이후 평양 중심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교세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눈에 띄는 성장세를 기록했던 것이다. 존스는 이와 같은 놀라운 “한국 교회의 성장이 이 민족의 급속한 복음화에 대한 밝은 약속을 제공하였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본국 교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선교 확장에 따른 인적 및 물적 지원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미국 교회들의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감리교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미국 교회의 지원이 현장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한국 교회의 교세는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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