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선교사의 순교와 그 영향

 

그리피스의 말대로 이 “시험적인 무역 항해”는 시기적으로 볼 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조선에는 불란서 함대가 조선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팽만했고, 이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면 모두 불란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반불란서 정서가 충천한가운데 외국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화를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중무장을 한 상선에 승선해 조선의 입국을 꾀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무장을 한 상선에 승선해 조선을 입국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런던 선교회 총무 멀린스(J. Mullens)가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나간다니 이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요, 더욱이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곧 북경에 돌아와서 당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십시오”라는 경고성 편지를 서둘러 보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토마스는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 조선으로 향하는 셔먼호에 올랐다.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Preston)이 영국의 메도우(Meadows)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 트기 위해 선적한 면포, 유리그릇, 철판,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Wilson) 그리고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청나라와 말레이지아인 19명의 동양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7월 29일(음 6월 18일) 천진을 떠난 셔먼호는 8월 11일 지푸를 거쳐 17일에 대동강 어귀의 황해도 황주목(黃州牧) 삼전면(三田面)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비록 상선이기는 하지만 그 배는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류가 금지된 조선인들이 볼 때 그것은 순수 무역선이 아니었다. 셔먼호가 나타나자 황주목사 정대식, 우후 신영한, 통역관 이용숙, 군관 지명신 등이 그곳으로 황급히 달려가 셔먼호의 입국 목적을 물었다. 입국의 목적이 통상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황주목사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셔먼호는 듣지 않았다.

 
8월 19일 셔먼호가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 연봉포로 올라오자 정부는 급보를 전해 듣고 “요새 이상한 배가 우리 바다에” 많이 나타나니 “행동이 수상한 무리를 살피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황주목사의 입국 불가 전갈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밤 토마스와 그의 일행을 태운 셔먼호는 드디어 대동강 입구,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龍岡郡 多美面 上七里 株英浦)를 거쳐, 25일 평양을 향해 강 상류로 계속하여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草里坊一里 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는 급히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 군관 방익진(方益鎭), 평양부 서윤(庶尹), 신태정(申泰鼎)을 파송해 상선의 입국경위와 정황을 알아보도록 보냈다. 토마스는 입국의 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천주교(天主敎)가 아니라 야소교(耶蘇敎) 신자들이라고 전해주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대로 토마스는 문정관에게 “백성에 덕이 되고 인성(人性)에 선이 되는 진도(眞道)가 야소교(耶蘇敎)에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문정관은 그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그 달 27일에는 다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경대 밑에 있는 두로 섬(頭老島) 앞 포구에 머물렀다. 외국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원치 않았던 박규수는 다시 이현익, 신태정을 셔먼호에 보내 돌아가지 않을 경우 절차에 따라 잡아 문초하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전하면서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넉넉히 공급해주겠다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와 청국인 조능봉은 한국 관리들의 뜻을 따르려고 했으나 선장과 상품의 주인만은 굳이 반드시 물건을 교환할 것을 고집했다. 비록 박규수가 개화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례한 행동은 박규수는 물론이고 조선 정부 당국자들과 관리 모두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1865년에는 러시아 선박이 함경도 연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1866년에는 상하이주재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두 번에 걸쳐 서해안에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고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셔먼호가 입국하자 조정에서는 셔먼호의 입국을 예의 주시하며 삼엄한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866년 1월 대원군은 때마침 남하하던 러시아의 세력에 자극 받아 천주교에 대해 일대 철추를 가하게 되었다. 천주교 박해는 1872년까지 계속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南鐘三)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군대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대원군의 의도가 무위로 돌아 간데다 마침 청에서도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차제에 서양사상의 근원(根源)이라고 생각했던 천주교를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12명의 프랑스 신부들 중 리델, 칼레, 페롱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이 기간 중 8,000여명이라는 엄청난 천주교 신도들이 순교 당했다. 이것은 봉건왕조를 재확립하려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통역을 맡은 토마스 선교사가 문정관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충분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아 항해를 계속했는지, 아니면 조선의 능력을 평가절하 했기 때문인지 또는 조선을 계속 우호적인 시각으로 보고 자신들에게 큰 해를 주지 않을 것으로 믿고 그랬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몇 개월 간 한국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토마스의 한국어 실력은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항해를 강행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입장으로서는, 아니 충분히 알았다고 해도 제너럴 셔먼호가 항해를 계속하는 상황에서는 당국이 경계 태세를 한치도 늦출 수 없었다. 더구나 셔먼호가 가까운 강변에 닻을 내리고 좀처럼 물러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던 조선당국으로서는 진입해오는 셔먼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군 이현익을 제너럴 셔먼호에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으며 민관을 자극하자 사태가 더욱 악화, 강변의 군졸들과 성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토마스 외 3명의 서양인이 8월 29일 배에서 내려 만경대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본 후 옥현못으로 가려고 하자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신태정이 말려 이들을 배로 돌려보냈다. 만경대로 거슬러 올라왔을 때 두 명의 천주교 신자가 얼마의 참외를 가지고 배에 오르려다 체포되어 후에 강둑에서 처형되었다. 쑥섬에서는 선주 프레스톤과 중국인 통역이 강가로 나와 평양의 관리를 만났다. 30일에는 한사정(閑似亭) 위쪽에 닻을 내리고 저녁에는 그들 중 5명의 외국인이 초록색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중군 이현익이 배를 타고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이들은 갑자기 배를 돌리더니 뒤쫓아오는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하고는 그를 셔먼호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신태정은 작은 배에 올라타고 셔먼호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서 이들에게 이현익을 돌려달라고 밤새 애원했으나 헛수고였다. 이튿날 9월 1일 아침 9시에서 11시 사이 셔먼호는 무모하게 총을 난사하면서 항해를 시작 황강정(黃江亭)에 정박했다. 이어 5명의 외국인들이 작은 초록색 보트를 타고 강을 관찰하기 위해 마탄(馬灘)으로 이동하자 마을 사람들이 강에 모여 그들을 향해 “우리의 중군 이현익을 돌려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은 화살을 쏘았고 몇몇은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이들 외국인 다섯 명은 성급히 보트를 떠나 양각(羊角) 위쪽으로 달아나서는 셔먼호로 돌아갔다. 셔먼호는 다시 이동을 시작 양각도 하단으로 기수를 돌려서는 그곳에 정박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박춘권(朴春權)이 이현익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작은 배를 타고 셔먼호에 올라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치는 불가피했다:

二十五日(陰 七月十五日) 鳳壓津에 進泊한 제네럴셔만 號의 船長은 當時警戒의 任務를 帶하고 江을 上下하는 巡中軍 李翼鉉의게 相議事가 有하다하야 來하기를 請하엿다. 請에 依하야 中軍 李翼鉉은 洋船으로 하매 船長의 所謂인지 船員의 所謂인지 確知키는 難하나 中軍의 印信의 奪取하고 한 中軍을 執置하야 아모리 還送하기를 請하여도 入城還送한다하면서 漸漸 역상 上할 이고 許送치는 안엇다…閑似亭 上便 沙上에 걸리었다.

양각도 서쪽에 정박한 셔먼호는 물러갈 기미가 없었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태도를 바꾸어 직접 강변으로 나아가 이현익 대신 중군에 임명된 백낙연과 평양서윤 신태정을 독려해 “한사정 상편 사상”(閑似亭 上便 砂上)에 좌초한 셔먼호와 접전을 벌여 셔먼호를 침몰시키는데 성공했다. 양각도 모래 위에 좌초된 셔먼호는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며 공격하는 군졸과 관민들을 더 이상 당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해 관민들이 작은 배들을 연결하고 그 위에 솔가지를 가득 쌓아놓은 후 유황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고, 불타는 이들 배가 셔먼호에 닿자 셔먼호는 곧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7 (토마스 순교 기념교회)
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토마스 목사, 프레스톤, 중국인 서기, 조능봉 등 4인을 제외하고는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이 피살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배에서 뭍으로 나오는 이마다 살해되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배에 남아있던 토마스 선교사도 지니고 있던 1권의 한문 성경을 가지고 뭍을 향해 헤엄쳐 나왔다. 토마스는 자기를 죽이려는 병졸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건네주려 했으나 거부하는 바람에 전해주지 못했다:

이를 본 도마스 牧師는 殘餘의 聖經과 傳道書類를 힘이 밋는데 지는 全部 傳播코저 努力하엿스나 그만 다 맛초지 못하고 火焰에 기여 나리게 되엿다. 나려가면 軍人의게 被殺될 것은 事實인데 最後로 自己의 生命을 빼앗는 軍人의게지도 福音을 傳하리라하고 一券의 聖經을 手中에 잡은 後 배에서 나려 언덕으로 나아가니 企待리고 잇든 軍人은 어느 듯 달녀든다. 임의 朝鮮으로 날때부터 豫測하고 決心한 것이 매 무삼 意外의 일이 되며 무삼 무서움이 잇섯스랴! 도로혀 仁慈한 態度로 죽이려는 軍人의게 聖經 밧기를 勸하매 某軍人도 赤是人이 잇는지라. 들엇든 칼을 暫間 멈추엇다. 그동안 도마스 牧師는 두 무릅을 沙場에 고 머리를 숙여 에 대인 後 얼마동안 最後의 祈禱를 올니고 다시 니러나서 軍人의게 聖經밧기를 勸하엿스나 某軍人은 그의 말을 充分히 理解치 못하엿슬거도 事實이려니와 環境이 그것을 許諾지 안는 지라. 맛침내 칼을 그 가삼에 대여 하나님의 忠僕 도마스 牧師의 貴여운 生命을 빼앗고 말엇다.

이렇게 해서 토마스는 아내의 뒤를 이어 26살로 자신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토마스가 얼마나 복음 전파에 불타는 사람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누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없겠는가!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洪信吉),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金永燮)과 김종권(金宗權),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崔致良)이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板洞敎會) 창설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죽인 병졸 박춘권의 회심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토마스를 죽인 후 박춘권은 집으로 가는 길에 성경을 주워 가지고 돌아가 읽고 예수를 믿은 후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그의 조카 이영태(李榮泰)도 후에 주님을 영접하고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남장로교회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경번역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한글 성경번역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토마스의 순교는 평양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다. 셔먼호의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 12세 된 최치량은 토마스가 주는 세 권의 성경을 받고 보관하고 있다 겁에 질려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이것을 뜯어 자기 집 벽지로 발랐다. 최치량은 성경책으로 도배한 박영식의 집에 갔다 벽에 붙여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바른 이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해서 비록 자신의 생을 너무도 조기에 마감했지만 토마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셔먼호에 승선했던 토마스 일행이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주재 미국 공사는 와츄셋(Wachusett)호를 한국에 파견하여 셔먼호의 행방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함장은 산동연에서 선교하고 있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 콜베트(Corbett, 郭顯德)에게 동행할 것을 요구했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콜베트는 와츄셋호에 승선했다. 1867년 1월 21일 지푸항을 떠난 와츄셋호는 23일 황해도 장연(長淵) 목동포에 입항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해주고, 천주교 신자 김자평 노인을 만나 셔먼호의 행방을 알아보고 29일 지푸로 돌아왔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왔다.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이들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 다시 한번 터툴리안이 말한바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진리가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1927년 5월 8일 그가 묻힌 쑥섬에서 “천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예배를 드렸고, 장로교 총회는 그곳에 기념예배당을 지어 1933년 10월 14일에 봉헌예배를 드렸다.


-한국기독교회사 1권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5.30 08:28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