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너럴 셔먼호 행방 추적

 

 쇄국정책, 강화도조약, 정치적 대립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도 강대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한국에 대한 압력은 갈수록 거세어졌다. 1866년 1월부터 진행된 병인박해로 인해 너무도 많은 불란서인 신부가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불란서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se)제독은 북경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베로네(Bellonet)를 통해 청나라에 조선원정의 뜻을 전하고 대대적인 응징을 계획했으나 때마침 인도차이나에서 발생한 소요로 출정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 소요가 진정된 후 로즈 제독은 1866년 가을 세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청의 지푸를 떠나 충청도 연해를 거쳐 강화해협을 지나 양화진까지 왔다. 그러나 그중 한 척이 강화해협에서 좌초당하는 바람에 형세만 살피고 다시 지푸로 회항하고 말았다. 로즈 제독은 1개월 후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보복을 강행했으나 강화읍을 점령하고 무기와 고서를 약탈하고 20-3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퇴각했다. 병인양요(丙寅洋優)의 사건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격퇴 사실을 청과 일본에 알리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가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8 (대원군 척사비)
셔먼호 사건이 난 바로 그 해 8월,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Earnest Oppert)가 탄 기선 엠페로(Emperor)가 한강을 거슬러와 비밀리에 라틴어로 편지를 보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강화의 행정관과도 연락을 하는 등 활발하게 국내 정황을 탐색하고 있었다. 오페르트에 의한 분묘 도굴사건은 서양인 그리피스마저도 그의 저서 한국: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에서 “시체도굴사건”(a body-snatching expedition)이라고 비난할 만큼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다시 한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양이(洋夷)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즉 화(和)하는 것이요, 화(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파는 일은 자손만대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의 글을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 행방 추적
한편, 앞서 언급한 제너럴 셔먼호를 추적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주청 미국 공사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은 청을 통해 조선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로완(Rowan) 제독이 급파한 슈펠트(Shufeldt)가 이끄는 미 군함 와추셋(Wachusett)호가 1867년 1월 14일 지푸에 도착한 후, 1월 21일 제너럴 셔먼호의 중국인 항해사와 미국인 선교사 코르벧(Corbett)을 통역관으로 승선시키고 지푸를 출항해 23일 황해도 연안에 도착했으나 진상규명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러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받은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한 마디로 오만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리피스(Griffis)는 그의 한국: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에서 이렇게 전한다:

아무 소득 없는 인터뷰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할 가치는 전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정보도 만족도 얻을 수 없었다. 한국인이 되풀이하는 골자는 ‘가능한 빨리 사라져라’(Go away as soon as possible)였다. 슈펠트 제독은…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일기(日氣)로 인해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셔먼호의 선원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67년 북경주재 미국 공사 서기관 윌리암스(S. Wells Williams)는 여러 명의 한국인 외교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 모두가 군중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한국인 21명도 이번 일로 인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여러 정보를 통해 “증거들은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몇 가지 거칠거나 혹은 무례한 행동을 함으로써 슬픈 운명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았다는 가정 추정에 도달한다”고 결론지었다. 윌리암스는 중국인 항해사 유 와우타이(Yu Wautai)를 통해서는 1867년에 바다로부터 10마일 떨어진 대동강 남쪽 둑에 물에 잠겨 있는 한 외국선체가 놓여 있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한, 한 한국인으로부터는 선원들 모두가 관원들 및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농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처럼 미국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채널을 동원해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추적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는 공식적으로 얻어진 정보가 아니라 한국인들과의 비밀리의 인터뷰나 다른 루트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확실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들이 얻은 정보에는 셔먼호에 탑승했던 선원들 가운데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이 아직 살아있고,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혹은 평양감사 박규수에 의해 체포되어 왕의 명령으로 참수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1867년 5월 로완(Rowan) 제독이 미국 군함 세난도(Shenandoah)호를 급파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세난도호는 대동강 입구에까지 왔다가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셔먼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남북전쟁의 수습으로 국내문제에 신경 쓰느라 셔먼호의 행방을 찾으려는 노력을 잠시 보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남북전쟁이 수습되어 어느 정도 자국내 정치가 안정을 회복하자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주청 미국 공사 프레드릭(Friedrich)과 상의해 강화도 공격을 계획하고 청국에 이를 통보했고, 청국은 다시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려주었다. 5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온 로저스는 3명의 전사자, 9명의 부상자를 낸 후 40여일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였다. 비록 53명의 전사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끈질기고 완강한 저항을 통해 미국 군함을 물리쳤다는 사실로 대원군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6.1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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