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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하야(下野)와 강화도조약
2008년 06월 20일 (금) 11:57:43 평양대부흥

 

대원군의 하야(下野)와 강화도조약

   
                         흥선대원군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오래 가지 못하고 종식되고 말았다. 외척 김씨 세력의 배제, 양반세력의 탄압, 천주교도의 박해, 경복궁 중건과 강제노역 등 대원군의 전제적인 강압 정치는 척족양반은 물론 일반국민에게서까지 적지 않은 반발을 초래했다. 그런 대원군에 대한 반감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며느리 민비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대원군이 주선해서 고종의 비로 맞아들인 민치록의 딸은 일찍 부모를 여윈 고아였으며, 따라서 왕비가 되더라도 외척의 전횡이나 권력에의 충동은 장차 없으리라고 예상했다. 더구나 민비는 자기 부인 민씨의 친척 중에서 선택된 여인이었기 때문에 며느리가 장차 자기를 권좌에 물러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재치와 비상한 정치적 수완을 타고난 민비는 자신의 수양오빠 민승호(閔升鎬)와 연합해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반대원군 정서를 널리 유포시켜 나갔다. 민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 대원군이 궁녀 이씨의 소생을 세자로 책립하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대원군에 반기를 들었다. 이제 고종이 22세가 되었으니 친정(親政)해도 된다는 명분을 앞세워 반대원군 정서를 널리 확대시키며 기회를 엿보던 차, 1873년 이항노의 문인 최익현이 일개유생의 신분으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나서자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반대원군 정서는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10년간의 섭정을 청산하고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친정이라는 미명 하에서 정권을 잡게 된 민비파는 대원군파를 제어하기 위하여 이유원(李裕元), 박규수(朴珪壽), 이최응(李最應), 조영하(趙寧夏), 전병국(全炳國)등 반대원군파를 합쳐 외척세도를 굳게 한 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반대하여 개국정책을 감행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하야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과감하게 문호를 열 것을 주장해 온 열국들과 일본에 적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 “국가 운영에 확고한 정책과 전망이 없는 친족정권의 허점을 여실히 파악한 일본은” 1876년, 20여 년 전에 자신들이 미국에게 당한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다. 1868년, 1870년-1871년, 그리고 1874년에 걸쳐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일본 정부가 문호개방을 위해 무력을 동원한 것이다. 1875년 9월 일본의 군함 운양(Unyokan)호를 부산항에 보내, 해로 측량은 물론 함포시위를 하며 불법을 자행하고는 한강 입구 강화도에 있는 초지진에서 우리 편 수병이 포격을 가하자 일본은 이를 구실 삼아 그 다음날 일본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해 초지진을 파괴시키고, 자신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1876년 6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조선 정부의 중신회의에서 쇄국양이를 내세우며 개항을 결사반대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제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는 여론에 따라 1876년 2월 26일 오전 8시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에는 “대일본”(Dai Nippon)과 “대조선”(Dai Chosen)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만, 韓㳓劤, 이 지적한 것처럼 실제로 그 내용은 국가 대 국가 간에 맺어진 평등조약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약의 내용 제 1조에는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규정되어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명시되었지만 실상은 일본 정부가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막고 장차 청나라 세력을 제거한 후 자신들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조약 체결 후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외에 2개의 조선 항구를 개항할 것, 일본 상인들의 세제와 주거에 대한 편의제공, 일본인들의 해안측량 등 일방적인 편의제공이 담겨진 조약이지 조선의 근대화나 발전을 염두에 둔 조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 정부는 조약에 따라 1880년 5월 1일 원산항을 개항했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국내에서 범법활동을 했을 때는 일본주재 공사가 재판의 전권을 맡는다는 내용이 담겨져 장차 조선 내에서의 일본인들의 한국침략과 수탈을 합법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놓았다. 강화도조약은 말이 국가 대 국가의 조약이지 내용을 살펴보면 “치외법권, 조차지 설정, 해안측량의 자유, 그리고 무역에 있어서의 관리간섭의 배제 등 조선으로서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들로 채워져 있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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