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 개화파(開化派)

 

개항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 개화파(開化派)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한국에 대한 열국의 문호개방 요구가 거세지면서 개항은 국내 정치의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개항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찬반 세력이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것은 개항이 곧 개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개화를 반대했던 위정척사파, 국제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급진적인 개화를 추진하자는 개화파, 중국식의 모델을 따라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자는 동도서기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이 세 가지의 정치적 조류가 국내 정치를 지배했다.

 


최익현(崔益鉉), 이항노(李恒老), 기정진(奇正鎭), 황준헌(黃遵憲), 김평묵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로 알려진 이들은 재야 유림집단과 더불어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명분으로 개항을 반대했다. 위정척사파들은 상당히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을 갖고 있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어떤 형태의 개국도 반대했다. 보수파로 통하는 이들은 주로 친청(親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던 모토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어떤 서구의 문화와 비교해서 결코 손색이 없기 때문에 개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개항을 하면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버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위정척사파는 개항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라며 배척했다. 오랑캐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괴롭혀온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라고 한 것은 기독교가 반국가 종교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오랑캐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스로 망국의 길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독교 정신이야말로 동양의 ‘칠거지악’이나 ‘남존여비’의 전통에 일대 도전이었다. 동양의 전통적 위계질서와 대립되는 기독교야말로 위험한 종교, 오랑캐의 종교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신 위정척사파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로 삼았던 것은 유학(儒學)이었다. 이들은 유학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종교체계라는 의미에서 유학을 정학(正學)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유학이 오랑캐의 종교, 위험한 종교인 기독교와는 달리 이 나라와 민족에게 가장 적합한 바른 학문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개화정책을 철저하게 반대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881년 3월에 있었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온건한 개화를 추진하던 金宏集(김굉집, 후에 金弘集으로 개명)이 1880년 2차 수신사 일행을 이끌고 일본에 건너가 당시 주일 청국 참사관이었던 황준헌(黃遵憲)이 당시의 국제질서의 변화를 고찰한 후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피력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헌사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남하정책을 쓰고 있던 가장 위험한 국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조선, 청나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연대하여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방(聯美邦)의 외교정책을 써야하고, 유럽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修好通商)하여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서양기술을 습득하여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였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중국과 일본에 해외 유학생을 파송하고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강대국의 위협에 처하고 있던 당시 정부 지도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김굉집을 통해 이 책을 헌사 받은 고종이 대신들에게 이를 검토하도록 지시했고, 이 책을 읽어 본 대신들 중 상당수가 당시의 급변하는 주변국들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외교정책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조선책략을 복사하여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통적인 척사론에 깊이 물들어 있는 유생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전국의 유생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것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방(聯美邦)의 외교정책이 외국과의 개항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결국 그로 인해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항을 반대한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비롯한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들은 중국식 개화정책을 주창했다. 이들은 중국형 개화정책을 모델 삼아 전통 고유문화를 계승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통해 자강(自强)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동양의 종교와 윤리는 고수하면서 근대적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농업, 의약, 병기 등에 있어서 서양의 기술이 동양의 기술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과거 개화를 반대했던 유생들 가운데서도 서양의 기술문명의 선별적인 수용, 국립은행의 설치, 화폐정책의 개혁 등을 주창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청나라를 다녀 온 이들이나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 온 이들은 이들 양국이 서양의 기술문명을 전수하기 위해 서양 각국에 유학생들을 파송하고 정부적인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동도서기파는 위정척사파들이나 개화파는 물론 기독교계로부터도 심한 비판을 받았다. 감리교의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정동교회의 최병헌도 “지금 세상에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서양의 기계는 취하고 쓸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서양의 종교는 숭상할 수 없다고 하여서 이것을 이단으로 지적하여 버리니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며 동도서기파의 모순을 지적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급진 개화당(急進 開化黨) 지도자들은 일본의 메이지(明治) 유신을 따라 급진적인 개화를 주창했다. 자연히 이들은 위정척사파가 친청(親淸)의 입장을 취한데 반해 친일(親日)의 입장을 취했다. 이들 중 앞의 세 사람은 개화당의 창당멤버들이었고, 그 중 박영효는 1881년 7월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고, 루미스가 “지성적이고 야심 찬 젊은 관료”라고 불렀던 김옥균과 서광범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1년 전 “1875년 비밀리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 건너가” 진보 사상을 접하고 돌아와 그들이 본 것을 왕에게 담대히 전해주었다. 1870년대 시작한 이들의 개화사상은 그 후 3, 40년 동안 한국 정치, 문화, 경제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건너갔다 돌아온 김옥균은 왕에게 일본식의 화폐제도와 우편제도를 설립하고 총망 받는 30명의 젊은이들을 해외에 유학시킬 것을 건의했다. 김옥균은 이듬해 고종의 허락을 받아 우표를 인쇄하고, 화폐 주조를 위한 은을 구입하고, 젊은이들을 일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김옥균은 이들 유학생들을 당시 동경에서 가장 탁월한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 위탁했다. 그러나 그들 중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면 결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언제든지 처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줬다. 하지만 루미스에 따르면, 얼마 되지 않아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선교사의 가르침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후쿠자와 유키치를 떠나 쯔키지(築地)에 있는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다.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일본에 유학 갔던 한국인들 가운데 기독교학교에 재학하면서 자연히 기독교로 회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루미스의 언급과 유사하게 1884년,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도 한국, 국내외(Corea, Withoout and Within)에서 일본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에 한국유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 동경에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의 샌험중학교(Sandham Academy)에 7명의 한국 젊은이가 재학하고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두 명의 한국 소녀가 요꼬하마에 있는 미국 선교사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김옥균은 자신이 소개한 학생 중에 두 명이 후쿠자와를 떠나 기독교학교로 적을 옮긴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대노했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의 뛰어난 성품과 진지한 태도를 관찰하고 묵인하기로 했다. 이 즈음 헨리 루미스(Henry Loomis)가 김옥균을 만났고, 얼마 후 그를 식사에 초대했으며, 김옥균은 기꺼이 그 초대를 수락했다. 식사 후 루미스가 건네 준 중국어 성경 한 권과 기독교 증거(Evidences of Christianity)를 받아들고 집으로 가지고 가서 기독교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깊어지면서 그는 루미스와 낙스(George William Knox)와 두 명의 다른 친구를 식사에 초대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대화의 주된 주제는 역시 기독교였다. 이처럼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있는 동안 루미스 외에 여러 선교사들과도 교제를 나누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서구문화와 서구문화의 뿌리인 기독교까지 과감하게 수용하는 당시 일본의 실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우리와 역사나 경제적인 여건이 비슷한 일본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열강에 합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메이지유신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서구의 문물을 과감히 수용하고 서구의 사상까지도 과감하게 수용한 결과 그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실제로 메이지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의 성공 이후 한편으로는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기구를 결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구미 열강의 영향에서 벗어난 강력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 일을 위해 정부는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개화정책을 채택하여 서구의 문화를 과감하게 도입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 결과 “187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는 외국인 거주지나 도시에서 지방 마을과 농촌으로, 귀족층으로부터 농민층까지 확대되어갔다.”
메이지시대 일본의 초기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우수한 서구문명의 기초임을 파악하고 서구문명의 도입과 더불어 기독교도 과감하게 수용할 것을 주창했었다. 일본을 선진국가로 이끌기 위한 동기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한 기독교 지도자의 다음과 같은 회심 동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는 우리 조국을 위해서였다. 우리나라를 서구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많은 점이 차이가 있음을 알았고 우리들은 조국을 선진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열망으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근대화 작업이 기독교의 수용 결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일본의 근대화 작업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에는 기독교 수용과 더불어 서구 문물을 수용하여 선진국가로 끌어올리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도 팽배하기 시작했다. 근대화 작업의 필요성을 외친 이들은 비단 기독교인들만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 조차 일본의 근대화 작업은 시대적 사명이라고 여겼고, 그 결과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사회적 변동 속에서도 경제적 향상을 이룩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지적한 것처럼, 개화기에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특히 개신교는 발전된 산업국가들의 종교와 동일시되었다.” 이와 같은 사고는 한국이 문호를 열고 개신교가 한국에서 놀랍게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화파는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이 기독교와 서구의 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외쳤다. 한국 최초의 우정국 창설을 주도한 것도 김옥균이었다. 이들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철저한 개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봉건질서의 재편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봉건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서구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마저도 주저할 것 없이 과감하게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다.
또한 이들은 양반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중인(中人), 무인(武人), 승려(僧侶) 등 신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광범위한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계급을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된다고 외쳤다. 지금 열강이 성장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균형인데 유독 조선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균형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일부 역사가들은 왜 로마가 멸망했느냐는 답 가운데 하나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불균형을 들고 있다.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군대의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이 피지배층을 훨씬 압도해서 이로 인해 로마제국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양반의 세력들이 피지배층에 비해서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한국의 성장을 저해하는 장애요인(障碍要因)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양반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 왕래하며 일본의 혁신 정치와 그 부강을 목도한 청년 정치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은 청에 의존하려는 척족(戚族) 중심의 세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유신 정치를 본받아 획기적인 정치 혁신”을 기하려고 한 것이다. 민영익을 비롯한 보수파들이 친중국파(親中國派)였다면 이들 개화파 지도자들은 친일파(親日派)들이었다. 이들 개화파 지도자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중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촉구하고,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 방한 중 고종(高宗)의 알현을 지원하고, 내한 서양 선교사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등 문호개방과 한국선교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권중에서 발췌-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6.2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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