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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
2008년 06월 20일 (금) 12:32:13 평양대부흥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

   
                                                 이승만과 옥중의 지도자들
 
영적 각성운동을 통해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도둑질한 물건이나 돈들을 되돌려 주었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범했던 잘못된 죄악들을 토로하였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마다에서 이와 같은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이어졌다.

그 한 예가 해주의 교회이다. 1907년 해주에서는 부흥운동이 발흥해 그 불길이 18개 교회로 확산되면서 전체 교인 중 3분의 2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그와 함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길함 박사와 방위량 선교사가 1907년 2월 영유에서 사경회를 개최할 때 “한 사람이 일어나 교회 가까이에 있는 계곡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고는 단상 앞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 형제를 두드려 깨운 후에야 일어났던 일도 있었다. 한국의 어떤 중국 상인은 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찾아와 그가 회심하기 이전, 몇 년 전에 부당하게 착복한 거액의 돈을 되돌려 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 모든 죄들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법이다. 부흥운동 이후 이전에 비해 권징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1907년 가을 3개월 동안 현장을 돌아본 한 선교사는 “이 가을에는 이전보다 실제적인 문제들이 더 적었고, 권징의 사례들도 놀라울 정도로 적어 전 지역에서 단지 4차례에 불과했다”고 보고하였다.


한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확실히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결과”(The Direct Effects of the Revival)였다. 이 사실은 선교사 가정의 한 하인의 경험에 의해 잘 예시된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10년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충실하게 교회에 출석했고 항상 예배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부흥운동 초에 그는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부흥회 기간 동안 자주 일어나는 통회의 장면은 일종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일하는 부엌은 종종 부흥운동 장면을 흉내 내면서 자신의 동료들과 즐기는 일종의 무대였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주먹으로 바닥을 치는 체하기도 하고, 몸을 뒤틀면서 부흥회 장면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의 주인이 그에게 하나님과 화해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그 방을 나갔다. 다음날 집회가 열리자 그는 교회 앞자리의 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일어서서 자신의 죄를 토로하고 자신의 생애의 모든 죄악들을 고백하였다. 다른 것들 가운데 그는 그의 주인의 신의를 저버렸던 행위들을 말했다. 드디어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서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가 그를 고용한 선교사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고 그가 범한 모든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그 순간부터 그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부분적으로 죄를 고백했던 자들도 후에는 자신들의 모든 죄들을 일일이 고백하였다. 때문에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이들은 그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 사경회 기간에 김 장로를 미워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던 강유문은 자신이 고백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몇 년 후 한 여인이 강씨가 교회 직분을 맡고 있는 동안에 그와 부도덕한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면서 강씨가 그것을 숨기고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났다. 부흥회가 끝난 후 강유문은 점차 교회에서 멀어졌고, 결국 선교회는 그를 해고해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교회에 발을 끊었고 의도적으로 방위량 선교사를 피했다. 그 후 강씨는 점점 더 완악해져 마침내 그 도시의 포주가 되어 남은 생애를 아편과 더불어 사악한 생을 보내야 했다.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총을, 숨기는 자에게는 죄를 드러내시고 그를 방탕과 어둠으로 몰아내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예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들을 철저하게 회개하였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갔다. “강씨와 같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에 미친 부흥의 효과는 대단히 유익하고 고무적이었다. 전 교회가 정화되었고 화목해졌으며 새롭게 되었다. 우리가 그 해 가을 우리의 독립적인 한국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모였을 때 다툼에 대한 소리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한국 전역,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면 중국과 일본에 가능한 빨리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려는 대단한 열망만 있었다.”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지난 몇 개월을 돌이켜 본 한 선교사는 1908년 5월, 부흥운동이 가져다준 효과 가운데 하나가 “신자들 가운데 의와 죄의 의식을 심화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죄의식)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교훈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였다. 한국들에게도 죄와 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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