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변혁이 일어남

 

한국인의 의식과 삶속에 놀라운 변화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지난 몇 개월을 돌이켜 본 한 선교사는 1908년 5월,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효과 가운데 하나가 "신자들 가운데 의와 죄의 의식을 심화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죄의식)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교훈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였다. 한국인들에게도 죄와 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부흥은 교인들의 마음에 죄의 극심한 죄악성을 깨닫게 하여 주는 동시에 의에 살고 행하는 것이 우리 평생의 책임이 된다는 의식을 깊이 넣어 주었다.”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은 교회의 삶을 변화시켰다:

약 반 마일 떨어진 큰 두 마을에는 상당히 강한 두 교회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사역을 시작한 이래 나는 그들을 하나로 합해 한 교회를 이루려고 시도했으나, 이 시끄러운 교회는 항상 교회에 대한 우리의 계획을 위축시켜 왔고, 그 결과 그 지역에서의 주의 사역 역시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흥운동이 이곳에 임하자 탄식과 눈물로 교만과 질투와 증오를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나 이제는 그들이 연합하여 큰 타일로 덮은 교회를 건축하고 있다. 올해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이와 같은 부흥이었다.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부흥운동이 없었다면 교회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을 것이지만 부흥으로 교회가 새롭고 살아있는 교회로 태동되었다.”


이처럼 부흥운동은 영적 갱생을 통해 한국 교회를 새롭게 정화시켰고, 죄의식을 더 강화시켰으며 윤리적인 면에서도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부흥운동이 한창 한국 전역에 일고 있을 즈음 평양 지역의 북감리교 선교사 모리스는 부흥운동이 한국인들의 도덕 수준을 지금까지보다도 더 한층 높여 주었다고 확신하고, “한국 교회 기독교 의식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개인의 각성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화가 외면의 정화로, 개인의 각성이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기독교 문화 변혁이 한국인의 의식과 삶 속에 놀랍게 움트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을 체험했고, 그 결과 교회의 신앙 수준이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 북감리교 선교회 감독 해리스는 1908년 볼티모어에서 열렸던 북감리교 총회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는 전적으로 훌륭하였다. 즉 교회의 신앙수준이 더 높아졌고, 미리 자상(仔詳)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狂信)은 거의 없었으며, 정신 이상과 같은 사건도 하나도 없었고, 수천 명의 신도가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졌으며, 다수인에게 성직의 소명을 받게 하였고, 그보다도 더 많은 교회들이 성경 말씀을 공부하려고 무려 2천 명의 대집회를 한 장소에서 거행하였으며, 수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였고,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 도박, 광신적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 신도들, 수천 명의 잡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해리스의 보고는 부흥운동이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우리는 부흥운동이 개인적인 영적 갱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성신의 권능은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잘못된 길을 걷던 여인들에게 깨끗한 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모든 잘못된 일이 바로잡히게 되었고, 도둑맞은 돈이 되돌아”오는 등 이 부흥운동은 신앙생활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평양은 그야말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변했고, 주일에는 불신자들마저도 가게문을 열지 못할 만큼 개혁의 분위기가 강하게 조성되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6.20 12:37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