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파 경건주의


루터의 후계자들 가운데 멜랑히톤을 따르는 필립주의자들이 개혁파와의 모종의 화해를 주도하자 순수 루터파(Gnession-Lutheran)들은 절충적 현상을 반대하였다. 17세기 루터파 신학자들에 의해 루터교의 엄격한 교리화 현상인 교파화(Verkonfessionalisierung)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반 대학과 김나지움에서 아리스도텔레스주의가 다시 등장 루터교 교리는 더욱 경색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신앙을 신학화하는 작업에는 성공했으나 신학이 삶과 괴리될 수 없다는 루터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개혁교회가 중생의 신학에 비중을 둔 반면 루터교는 루터의 칭의론에 토대를 구축 17세기 루터교의 윤리적 무감각성은 루터교의 심각한 약점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였다.


신앙(Glaube)과 삶(Leben) 사이의 연결은 항상 명확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법정적 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행위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로 경건주의 밖에서 루터교 평신도들은 기독교가 일련의 교리적 신념일 뿐만 아니라 삶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루터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긴급한 상황 때문에 기독교 위에 확립된 교회 정치의 개념을 영속화하려고 하였고, 통치자들은 보통 타락하고 방탕한 이들이어서 기독교 이상과 현실 상황과의 괴리가 심각하게 벌어지고 말았다. 국가교회와 관련된 문제도 루터교가 안고 있는 문제였다. 해당 지역에서 태어나고 세례 받고 입교한 이들은 거의 모두 다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이들에게 윤리란 높은 수준의 신앙적 윤리가 아니라 사회의 일상 도덕 수준 정도에 머물렀다.


더구나 신앙을 이끌어야 할 목회자들의 설교가 교리적 설교가 대부분이어서 그 메시지는 메마르고 비효과적이었다.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루터교에 속한 짐나지움과 대학의 도덕적 수준이 개혁교회 학교들의 도덕적 수준보다 현저하게 낮았다는 사실이다. 루터교의 학교에서 독일의 목회자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경건주의는 자연히 신학교육의 개혁을 열망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술 취함, 뇌물 수수, 잔인성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곤경에 대한 냉담한 무관심등은 당시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크리스티안 게르버(Christian Gerber)는 이렇게 탄식했다.


“농부들은 동물처럼 살았다. 부자들은 맥주 벤치에 앉았다. 매일 이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은 일요일에 이것을 하였다. 부자들은 아침까지 춤과 술에 빠져 있었고 더욱이 논쟁과 주먹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그 안에서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부분의 개혁은 교회의 삶의 도덕적 부패, 권징의 결여, 생명력을 상실한 설교, 통치자의 교회 지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때문에 루터교 경건주의자들은 교리의 개혁(Reformation of doctrine)에 삶의 개혁(Reformation of life)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제로 이해했다. 이들이 루터에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도 그가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았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신앙은 선한 열매와 선한 행위를 낳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러한 모든 선한 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루터파 경건주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요한 아른트(John Arndt, 1555-1621)은 프리드맨이 지적한 것처럼 루터가 이해한 말씀의 교리를 윤리적 교리로 변형시키고 칭의의 체험을 성화의 체험으로 바꾼 진정한 경건주의 아버지였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자였고 양떼를 먹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을 함양하는 일을 열심을 다해 실천했다. 설교는 단순했고 성경적이었다. 그의 설교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고 예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의 설교는 직설적이고 진지해서 적대자가 생기기도 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신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적대자들의 의무를 깨우치고 상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슬픈 이들을 위로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잘못된 자들을 책망하는 일에 있어서 지칠 줄 몰랐습니다.”


그의 작품 <진정한 기독교>에서 그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강조한다. 아른트의 경건은 영적갱신, 새로운 삶, 이것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영적 갱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가져다준 결과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개개인 안에 진정한 믿음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안으로부터” 새롭게 된다고 믿었다. 이렇게 새로워지는 과정에서 참된 회개가 포함된다. 그에게 회개란 신앙의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바르고 내적인 마음의 회개로 부르셨고 마음을 하나님에게 돌이키도록 부르셨다. 그러한 회개가 없으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


믿음을 영적갱신의 필수적인 요소로 이해한 그는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며 헌신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뢰로 이해했으나 그는 믿음을 인격에 대한 신뢰로 이해한 것이다. 아른트는 새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삶이란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에 의한 영적 생명의 상태로 과격하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아른트의 이상은 경건주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50)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어갔다. 알사스의 랍폴츠바일러에서 태어난 슈페너는 경건한 부모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슈페너에게는 아른트의 경건과 퓨리턴의 경건이 함께 어루어져 있었다. 1651년부터 1659년까지 신앙의 실천적 경향이 강한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교육받는 동안 아른트 풍의 신비주의 경건과 퓨리턴의 경건을 하나로 결합시키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 기간 그가 저술한 <독백과 거룩한 명상>(Soliloquia et meditationes sacrae)은 아른트의 신비주의 경건과 퓨리턴의 관심이 한데 어울러져 있다. 그의 경건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게루스(Antonius Legerus)와 라바디(Jean de Labadie)였다. 그는 바젤로 가서 그곳에서 발도파 설교자 안토니우스 레게루스와 밀접한 교제를 나누면서 그의 인격에 감동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라바디와의 교류를 통해 체험적 유형의 경건을 정립해 나갔다. 1670년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경건의 모임”(collegia pietatis)를 시작했고 1675년 경건의 열망(Pia desideria)을 출판했다. 그 후 그의 경건주의 사상이 100년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그는 경건주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아른트의 경건은 슈페너이 경건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에르네스트 슈루플러는 이렇게 집약 한다:


“슈페너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배후에는 아른트 유형의 경건이 중심에 있었고 그는 결고 이것을 떠나지 않았다. 아른트의 경건은 그의 요람 안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를 읽는 것이 성경을 읽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던 랍폴트슈타인의 집에서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사실 여기서 성경은 다른 경건한 루터교 가정에서와 마찬자기로 아른트의 안경을 통하여 읽혀졌다. 의미 있게도 슈페너의 경건한 열망이 처음 나타난 것은 아른트의 주석의 새로운 판의 서문에서였다.”


아른트의 경건이 슈펜너의 사상에 그대로 녹아 있었던 것이다. 당대 사람들이 아른트의 경건과 슈펜너의 경건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슈펜너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미친 것은 청교도 전통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제네바를 여행할 때 그는 라바디의 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가 라바디의“경건입문서”(Manual of Piety)를 독일어로 번역 출간한 것도, 경건의 모임 역시 프랑스인의 모임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슈펜너의 영적 순례는 칼빈주의 전통에서 유래한 경건문학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끝맺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개혁교회 경건주의는 슈펜너의 경건 사상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펜너의 경건의 핵심 사상은 그가 저술한 경건의 열망에 그대로 녹아 있다. Die Pia desideria는 그의 전생애와 사상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이 책에서 슈펜너가 추구하려고 하는 이상은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을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슈펜너는“나는 루터의 개혁이 사람들이 희망한 대로 완성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루터 자신도 교회의 개혁이 삶의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실을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안에서 표현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슈펜너는 이러한 목적에서 어긋나는  듯한 모든 공동체적 개인적 교회의 삶의 양상을 비판했던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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