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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의 한국선교 준비
2008년 07월 04일 (금) 10:40:37 평양대부흥

 

존 로스의 한국선교 준비


   
                              존로스 선교사
 
일찍이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 “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羅約翰)는 제임스 그레이슨(김정현, J. H. Grayson)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중국어(中國語)와 만주어(滿洲語)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미 1867년 영국 장로교 선교회 소속 윌리엄 번즈(William Burns)와 아일랜드 장로교 선교회 제임스 와들(James Waddel)과 조셉 헌터(Joseph Hunter)에 의해 토양이 개간된 만주는” 존 로스의 선교지로서 적격이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결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로스는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Catherine Ross)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선뜻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John MacItyre)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로스는 1881년 재혼할 때까지 7, 8년을 여동생 캐더린의 도움 속에 홀로 지내며 한국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아내 캐롤라인과의 사별의 슬픔을 딛고 한국선교를 불태웠던 로버트 토마스처럼 로스 역시, 아내가 세상을 떠나던 그 해 가을, 장장 천리길이나 되는 긴 전도여행을 떠난 것이다.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西間) 지역으로 일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만주 우장(牛莊)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흥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암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포기하고 “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의 한인과 친하게 되어 자기가 갖고 있었던 한문 성서 몇 권을 그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배포한 성경을 읽고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로스는 1873년 가을 만주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했다. 로스가 코리안 게이트(the Korean Gate)라고 언급한 고려문(高麗門)은 한․청 양국의 국경지대인 봉황성(鳳凰城) 바로 밑에 있는 작은 촌(村) 거리를 말하며, 국경을 표시하는 장책(長柵)이 있어 책문(柵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문은 “한․청 양국의 유일한 관문”으로 일년에 네 차례 시장을 열었던 지역이라 로스는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에 갔던 것이다. 중국인 여사(旅舍)에 짐을 풀고 매일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만났다:

나는 가능한 한 한국인들과 한국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보려고 그들이 숙사(宿舍)의 내방에 아주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완전히 개방했다. 그들은 아침 여덟시부터 들르기 시작하여 잠자러 물러가는 밤 열시가 되어서야 중단했다. 자연히 ”외국인“을 만나고 서구 나라들에 관해 배우려는 호기심으로 그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의 풍성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그 대가로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저으기 실망하면서 우장으로 돌아 왔으나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나의 강렬한 흥미는 나로 하여금 그 다음 해에 다시 고려문을 찾게 만들었는데, 그때에는 나에게 더 행운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호기심에 끌려 로스가 설교할 때 서서 들어주기도 하였지만, 존 로스가 고백한대로 “그들의 관심은 내가 전하는 교리보다는 내가 입은 옷가지에 더 있었다.” 1874년 4월 말에서 5월 초 로스는 자선 사업가 아딩톤(R. Arthington)의 재정 후원으로 서기(書記)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가서 자신의 어학 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번의 실패를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자기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나타나지 않고 서기를 시켜 어학 선생을 찾아 나서도록 했다. 존 로스가 어학 선생을 찾으려고 한 것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려문을 찾은 것은 “이 백의의 겨레에게 특히 제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에 와서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이주민들에게 현세에서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미래 하늘나라의 축복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서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의주 출신 중인 이응찬(李應贊)이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갑자기 남서풍을 만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물에서 나왔으나 물건은 찾을 길 없게 되었고, 갑자기 무일푼의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1890년 로스는 이응찬을 만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술회한다: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러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우연히 한국말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파견된 나의 서기와 만나게 되었다. 하루 저녁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나를 만나자 그는 그의 친구들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에 곧 나의 선생이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앞에서나 모르는 척 해달라고 신신 부탁한 다음에 뛰어 나가서 친구들이 여관에 채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따라갔다. 그 후에 그는 다음 주일의 일을 위하여 나에게 왔다갔으나 모르는 사람인양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장으로 떠나는 전날 밤에는 같이 온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는 척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음날 밤까지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저들이 코를 골고 깊이 잠잘 때에 여관을 탈출하여 서편을 향하여 가겠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밤새도록 우리는 여행을 계속했다. 새벽에 여관에 들어가서 조금 눈을 붙였다가 점심때에야 겨우 아침을 먹었다. 그 후에 안 바에 의하면 그는 끝까지 자기 친동생에게까지도 자기의 의사를 말하지 않았었다. 그가 그렇게 비밀을 엄중히 지킨 것은 만일 자기가 서양인과 같이 일하러 갔다는 말이 관청에 알려지면 그의 일가친척은 모두 감옥신세를 지게 되고 그들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 되는 사람은 목이 달아나게 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외국인과 교제한 사람에 대한 국법은 언제나 엄중한 것이었지마는 특히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고 한강을 억지로 소상한 이후로는 서양인과의 교통에 대한 대원군의 금령은 더욱 엄중하여졌으므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든가, 일꾼을 얻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폭풍으로 배가 전복되어 재산을 잃어버린 돌발적인 한 불상사가 마침내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한국인민에게 주는 결과를 맺게 된 것은 실로 재미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구가 불과 1,500만 밖에 되지 않고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며칠이면 해득할 수 있는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는 성서와 전도문서의 보급이 가장 쉬운 나라이므로 한글 성서의 역간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는 표음문자인 데다가 너무도 아름답고 단순하여 누구나 쉽게 그리고 신속히 배울 수 있다.

이응찬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로스 일행을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로스의 사역을 지원한 것이다. 이 때가 언제인지 한국측 자료는 상이하지만 로스는 이 때가 1874년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본래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응찬의 어학 지도로 로스의 어학 실력은 1877년 한국어 교본, 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A Corean- English Primer)을 저술할 정도로 급진전되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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