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결실

첫 독노회가 조직 되면서 해외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했다. 복음의 빚 진 자의 본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이들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놀랍게 임하고 그 부흥의 열기는 선교로 이어졌다.


놀라운 부흥운동의 현장에서 은혜를 경험한 일곱 명이 목사 안수를 받고 그 가운데 이기풍선교사가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제주 선교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결실이었고, 선교로 시작한 한국교회의 모델이었다. 제주 선교 역사는 곧 한국선교 역사였다. 한국선교의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간직한 곳이 제주였다. 제주 선교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한국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제주 선교는 사도행전 이후 가장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의 결실이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것은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죄를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성령의 강권적인 임재의 역사가 온 회중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한국선교 불과 25주년 만에 한국은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견줄 수 있는 견실하고 건강하고 참된 부흥이었다. 그 놀라운 부흥운동의 진원지는 평양이었고, 그 주역들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생들이었다. 길선주와 다른 일곱 명의 목사 안수를 받은 이들은 모두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한국교회로 파송하기 전 그들을 성령으로 기름부으신 것이다. 부흥운동과 선교의 만남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특징이었다. 할레 공동체와 해외선교, 모라비안 공동체와 해외선교,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운동과 국내외 선교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1907년 놀라운 부흥이 장대현 교회에 임했고, 얼마 후 평양신학교에 임했다. 바로 그해 이기풍은 평양신학교 졸업반이었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 역시 평양신학교 졸업반이었다.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한국교회에 민족복음화와 해외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더욱 고취시켜 주었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대부흥운동의 촉발, 4월 첫 주 평양신학교 재학생들의 놀라운 부흥의 경험, 1907년 9월 독노회 조직과 제주 선교 이기풍선교사 파송 결정, 그리고 장대현교회에서 1908년 1월 이기풍선교사를 제주에 파송한 것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평양대부흥운동과 제주선교와의 깊은 연계성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한 이기풍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에 의해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 장대현교회에서 파송예배가 드려진 것이다.

-박용규, 제주기독교회사 서론 중에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8.09.2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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