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휘필드의 영적각성의 체험

조지 휘필드
감리교 운동을 처음 시작한 조지 휘필드가 인격적인 영적각성을 체험한 것은 1735년의 일입니다. 그가 회심을 경험한 것은 홀리 클럽의 정신 때문이 아니라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의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 때문이었다. 이 책은 휘필드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휘필드는 이 책을 통해 받은 감동을 이렇게 고백했다.“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휘필드는 기독교의 참된 신앙이 어떤 누구에도 상처주지 않고 교회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그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임을 발견했다. 인간의 선행, 도덕적 삶, 윤리적 실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신앙관을 발견하고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1735년 20세 때 회심 직전의 영적 고행에 대해 이렇게 기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얼마 되지 않아 거룩한 절기인 사순절이 다가왔다. 이 절기를 친구들은 매우 엄격하게 지켰는데, 6주 동안 토요일을 제외하고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았고,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 동안에는 설탕을 넣지 않은 사르비아 차와 거친 빵 외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한 손의 일부가 완전히 얼어 까맣게 될 때까지 추운 아침에 계속해서 밖을 거닐었다. 이러한 계속적인 금욕과 내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나의 몸은 수척해졌다. 수난 주간에는 계단을 기어 올라갈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를 아껴 주시는 선생님께 몸의 상태를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즉시 의사를 불러 오셨다.”


7주 동안 그의 병은 계속되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기간을 보내는 동안 성령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휘필드가 자신의 일기에서 고백한 것처럼 성령께서 그 고통의 기간 내내 그의 영혼을 정결케 해주셨다. 성령께서는 휘필드 안에 집을 짓고 있던 이전의 내 모든 추잡함과 악명 높았던 죄악들, 심지어 내 마음의 죄까지 기억나게 하셨다. 휘필드는 기억나는 대로 그러한 일들을 즉시 적었고, 아침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다.”이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얼마나 많은 밤들을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몸부림을 쳤는지 하나님만 아신다. 나는 온종일 그리고 몇 주일이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를 주시기까지 나는 그분과 싸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이러한 시간을 보냈고 헬라어 성경과 홀 감독의 묵상을 읽고 기도를 했다. 휘필드는 무려 12개월 이상 동안 그의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박 아래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해방시켜주셨다고 고백한다. 휘필드는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고통스런 통회의 과정을 통과하고 성령 안에서 죄용서의 기쁨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 때 그가 만난 성경이 로마서 8장 15절-16절이었다.“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토록 그를 짓누르고 있던 악압과 속박과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휘필드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애통해하는 영이 나에게서 떠나갔고,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나는 어디에 가든지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점차 더욱 확고해져 갔다. 하나님을 송축한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 되는 대로 간헐적으로 그러시는 대신에 그때 이후로 아예 내 영혼을 거쳐 삼아 더욱 강성해지셨다. 이렇게 나의 애통하는 날들은 끝났다. 버림 받음과 시험의 오랜 밤이 지나고 전에 멀리서 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낮의 별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이제 하나님의 영께서 내 영혼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으며, 겸손히 바라는 바대로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주셨다.”


이 사건 이후 구원의 확신이 휘필드를 온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 후 휘필드는 글로스터로 가서 그곳에서 가브리엘 해리스(Gabriel Harris) 집에서 9개월을 머물면서 기도와 성경연구에 몰두한다. 이 때 그가 드린 기도는 휘필드가 고백하는 것처럼 두려움에 찬 기도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 속에 드려지는 감격과 감사의 기도였다.“오! 나는 글로스터에 다시 온 이후에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 얼마나 달콤한 교제를 누렸는지 모른다. 들판에서 달콤하게 묵상에 잠길 때 나 자신을 잃어버린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분 안에 있다는 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느꼈는가! 나는 매이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놀라운 평안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덕을 쌓아갔으며, 새 힘을 공급받았다.”이 기간 동안 휘필드는 어떤 책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었고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마음은 열리고 더욱 담대해져서, 다른 모든 책은 제쳐두고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매 구절과 말씀을 놓고 기도하였다. 이것은 내 영혼에 참된 고기요, 참된 음료였다. 나는 매일 위로부터 신선한 생명, 빛, 능력을 받았다. 사람이 쓴 모든 책으로부터 지금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참된 지식을 한 달 동안 하나님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한 마디로 성경 말씀이 모든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모든 충만한 길이며 모든 선한 말과 행동에 필요한 모든 지침을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딤후 3:16, 17)”


휘필드에게 놀라운 변화,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변화가 아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한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회심에서 성령과 말씀 그리고 기도는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특징들이었다. 이 경험은 성령의 인침, 성령의 세례라기보다 성령의 충만이었다. 휘필드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인간의 죄성과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것이다. 그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겸손하고 성자 같은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놀라운 경건의 삶”이 그 후의 그의 변화된 삶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놀라운 회심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휘필드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그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셔서 그분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지식과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져야 할 진리의 길로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휘필드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입장”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휘필드는 승리했다. 심지어 그는“이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고백할 만큼 교리적 확신을 갖고 있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휘필드는 성경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버킷(Burkitt), 헨리(Henry), 알레인(Alleine), 리차드 백스터, 제인웨이(Janeway) 같은 인물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이들 작품들은 교리와 모든 다른 복음의 진리로 휘필드를 이끌어 주는데 굉장히 훌륭하고 유용한 책이었고, 수개월동안 이러한 책들을 공부하고 기도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무릎을 꿇고 지냈다. 휘필드의 고백대로 이 과정에서 성경과 경건서적은 많은 유익을 주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의 생은 놀랍게 변화를 받았다.“하나님의 사랑이 내 영혼에 널리 퍼지자마자 고집과 분파적인 신앙의 벽이 내 마음에서 곧 무너져 내렸다.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어느 교파 사람이든 모두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멸시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는 크게 복을 받았다. 내 지식의 눈은 밝아졌고, 나의 고집은 깨어졌으며, 나의 감정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더욱 살아나게 되었다. 내가 믿기로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작은 신앙회에 더해졌다.”

 

휘필드는 곧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1736년부터“옥외 설교”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외칠 때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천 명이 모였다. 그는 1738년에 회심한 찰스 웨슬리보다 3년 앞서 부흥운동의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휘필드의 설교는 당시 어떤 다른 사람들의 설교와 달랐다. 당시 일반적이었던 산문형 논문을 읽는 대신 권위와 능력과 확신의 설교를 외쳤다. 1737년 1월 브리스톨에서 설교할 때 온 회중이 전율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휘필드가 자신의 일기에서 기록한 것처럼 5월 23일 브리스톨에 다시 갔을 때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걸어서 왔고, 그 도시 밖에서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탈 것들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왔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거리를 따라 걸어갈 때 인사하고 칭송했습니다.”

조지 휘필드가 졸업한 옥스퍼드 대학

1737년 8월부터 12월까지 글로스터, 옥스퍼드, 런던으로 이동하며 100회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때마다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1737년 한 해 동안 아홉편의 설교가 출판되었고, 11월에는 당시 유명한 <젠틀맨의 매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이 휘필드에 대한 칭송시를 게재할 정도로 청중의 반응은 좋았다. 1738년 미국으로 건너간 휘필드는 그곳에서 거의 한해를 보내고 그해 말에 영국 브리스톨로 돌아와 광부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한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갱에서 올라온 광부들이 몸에 뭍은 탄가루를 씻을 겨를도 없이 휘필드가 설교하는 곳으로 운집했다.


휘필드는 옥외설교를 계속해 나갔다. 그가 옥외 집회를 택한 것은 기성교회들이 그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성교회 목회자들은 그의 설교 스타일이나 그의 설교가 대중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생겼다.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미국에서도 옥외에서 설교를 했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평균 2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심지어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사람들은 휘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옥외로 몰려들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를 잊었고 농부들은 연장을 놓고 밤이든 낮이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운집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휘필드의 설교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휘필드는 탁월한 언어구사 능력을 소유했고, 대단한 웅변술의 소유자였으며, 언제나 세익스피어 회극 일부를 낭송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였고, 몸짓에 있어서 대단히 자유로웠다. 당시 런던의 일류배우였던 데이비드 개릭(David Garrick)이 휘필드의 말과 몸짓을 배우기 위해 자주 휘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갔을 정도로 탁월한 연기력을 소유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직설적이었고, 정직했으며, 매우 선명했다. 그의 설교 중 일부를 출판했던 미국 어느 설교자가 말한 대로“휘필드의 설교 스타일에는 고상한 자유분방함이 흘렀습니다.”그의 설교는 원고에 얽매이는 설교가 아니라 메모를 가지고 하는 즉흥설교였다. 그러면서도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표현한 대로 그의 설교가 갖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열심이요, 불이요, 열정이요, 불꽃”이었다. 그의 설교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성령에 의해 쓰임 받았던 베드로처럼 표현의 자유가 가득 배어난 설교였다.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가서 휘필드의 설교를 들었던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와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는 그의 설교가 준비도 없었고, 구성도 엉성했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며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고의 구성과 배열에 있어서 그의 설교는 매우 빈약했고 결함이 있었습니다. 정말 형편없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 수반된 기름부음은 너무도 놀라워서 은혜로운 감화를 받기 위해서라면 대서양의 그 무서운 파선의 위험을 여러 차례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휘필드의 설교는 즉흥적인 설교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권능의 설교였다. 그 설교를 들은 이들은 자신의 죄성을 보고 은혜를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죄성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의 본질과 필요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쳤다. 그가 런던과 브리스톨과 글로스터와 글로스터 주에서 놀라운 영적각성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자연인의 마음의 어둠과 죄악성을 얼마나 들춰내던지 사람들은 겁을 먹고 놀랐으며, 그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정념(Pathos), 사랑, 항거할 수 없이 녹이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휘필드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확신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보다 먼저 중생에 대한 설교를 외쳤다. 그는 회심하지 않은 설교자들을 무섭게 질책했다. 요나단 에드워즈가 말렸는데도 휘필드는 굽히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채 사역하는 설교자들을 공격했다.


휘필드는 칼빈주의와 전도가 양립할 수 있음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하면서도 그 구원 사역에서 인간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타락한 인간의 죄성에서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길, 멸망의 길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사악한 행위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의 계획을 강조하는 교리는, 언제나 그것을 참되게 설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전도를 하도록 강권하고 종용했습니다.”그는 평생 동안 청교도들의 작품을 읽고 연구하며 자신의 메시지에 적용하는 신학적 원리로 삼았다. 바른 신학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휘필드의 열정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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