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영성과 지성의 소유자, 에드워즈


웨슬리 시대 영국의 상황이나 하월 해리스 시대 웨일즈 상황처럼 에드워즈 시대 미국의 영적상황은 참혹했다. 에드워즈의 <성령 역사의 분명한 특징들>(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서문에서 쿠퍼(W. Cooper)는 당시의 영적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그러나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춰졌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습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 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규례들을 통해서 새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년 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신앙 상태였습니다.(때로는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 밖에 다른 마을들과 교회들은 그러한 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실한 교역자들과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이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불신자들이 타락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죄악된 사회를 향해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리는 일에 생명을 걸었다. 불신의 죄악이 얼마나 깊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였다. 그는 직설적으로 설교를 통해 이 사실을 전했다.“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에드워즈의 설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설교를 듣노라면 죄의 공포가 그들의 심령을 엄습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와 관련하여 그를 비판할 때마도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강변(强辯)했다.


“실제로 사역자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거나, 사실보다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또는 사실과 다르게 말한다면 그 때는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역자들이 더 많은 빛을 비추고 진상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양심이 크게 각성을 받는 것은 비추어진 빛 때문인데, 이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기들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많은 양의 빛을 비추면 그들은 더 크게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에 더 많은 빛을 비추려 한다든지, 이미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거나 방해함으로써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는다고 사역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향하여 그가 처한 상황이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진리만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죄인을 향해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심판으로 이어지는가를 경고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경우는 없다. 죄에 대한 분명한 지적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에서 당대의 교회 지도자와 달랐다. 에드워즈를 향한 공격의 고삐가 늦추어지지 않고 사방에서 몰아쳤지만 그는 그와 같은 태도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시들어가는 미국기독교에 생명을 불어넣고 죄악된 사회를 향해 회개를 촉구했다. 위대한 영적대각성운동이 그를 통해 발흥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그 사람을 다니엘 로랜드나 조지 휘필드보다 앞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고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요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물론 휘필드는 다니엘 로랜드처럼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휘필드나 다니엘 로랜드 두 사람은 다 에드워즈가 가졌던 이지나 지성이나 신학에 대한 이해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에드워즈처럼 철학적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볼 때 요나단 에드워즈야 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났습니다.”


에드워즈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예찬을 받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몇 가지 사실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영적인 침체의 시대에 그가 보여준 거룩한 삶이다. 도덕적 타락과 영적 타락이 심한 시대에 그가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거룩을 실천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그가 태어났던 시대적 지리적 환경을 초월하여 그가 이룩한 놀라운 학문적 영적 진보이다. 그는 식민지 미 대륙, 교육적 환경이 영국에 비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 비교적 외딴 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러면서도 진리에 대한 관심, 빛나는 재능, 겸손과 온유 그리고 탁월한 영성을 소유했다. 셋째는 에드워즈가 보여준 완벽한 균형이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다. 바울처럼 신학자이면서도 영혼들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목자의 심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가장 잘 조화시킨 너무도 훌륭한 칼빈주의자였다. 저는 그만큼 이 둘의 균형을 이룬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오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국면 속에 있습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이렇게 완벽하게 칼빈주의적으로 조화시킨 인물은 만나기 쉽지 않다.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신학자요 전도자의 삶을 그에게서 발견된다.


넷째는 지성과 영성을 동시에 소유했으면서도 지성이 그의 영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영성이 그의 지성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박식한 지식을 소유한 인물도 드물었다. 에드워즈는 철학자요, 문학가로 평가받을 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철학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그의 철학과 문학과 사상은 언제나 신앙의 지배를 받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놓고 그 권위에 자신을 철저하게 복종시켰던 것이다. 그의 탁월하고 빛나는 재능이 항상 그의 지성을 빛나게 했지만 에드워즈는 그것을 항상 최고의 위치에 놓지는 않았다. 최고의 권위 성경과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기를 원했다. 그가 설교자로서, 복음전도자로서, 신학자로서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그는 신학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에드워즈는 이전의 청교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과 지성을 조화시키며 자신의 사역과 작품과 삶의 전 영역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남긴 글들은 자신이 겪고 목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술이었다. 그에게 신앙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마음에 속한 것이며, 체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영적 교통을 갖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했다. 말씀의 객관성을 존중하면서도 그 말씀이 인격 안에 역사하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체험하기를 원했다. 1737년 에드워즈는 뚜렷한 영적 체험을 경험한 것이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고 충만하며 순결하고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거룩한 하늘의 정결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에드워즈가 여기서 만난 분은 성자 하나님이셨다. 십자가에 우리를 달리시고 영화롭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그 영광에 직면한 것이다. 성령 충만할 때 그리스도와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거룩한 교통을 통해 그에게 비추어졌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의 제 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빛으로 달콤하고 탁월하게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서 그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심정도 함께 따라왔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수반했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신앙은 마음에 속한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또한 체험적인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마음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또한 그 주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하기를 원했다. 그에게 신앙은 주로 마음의 일이기 때문에 마음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단순한 지적인 동의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에게 신앙은“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게 나누어 주시며, 성경적 교리와 합리적 교리 양자 모두에 의해 입증되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영광을 아는 참된 지각은 다른 것들 보다 더 고차원적인 종류이고 보다 고상한 성질을 가진 탁월함,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크게 구별시키는 영광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신령하고 신적인 빛입니다. 영적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은 진실로 이해하고 알고 지각합니다. 그는 단순히 합리적으로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거룩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합리적 신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 사랑스럽다는 지각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는 사변적인 판단도 있지만 그의 신적 속성 때문에 얼마나 친밀하신 분인가를 아는 지각도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거룩을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에드워즈의 설교는 열정적이고 진지했으며 가슴을 울렸다. 지성과 명철이 복음의 능력과 어울려 그의 설교를 더욱 힘 있게 만들었다. 그의 설교는 강의식의 설교가 아니었다. 본문에 대한 주석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찾으려고 노력을 기울였고, 그런 다음 그가 발견하고 체득한 생명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에게 논문을 발표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진리를 선포하고 그 진리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항상 뜨거움과 열정이 그의 설교에 진하게 배어났다. 그에게 좋은 설교는 기억하게 만드는 설교가 아니라 듣는 순간 마음으로 느끼고 결단하게 만드는 설교였다.


“설교를 통해서 얻는 주요한 유익은 설교 당시 마음속에 생긴 인상이지 전달받은 것을 후에 기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할 때 들었던 것을 후에 기억하는 일이 때로 매우 유익할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기억이란 설교할 당시의 마음에 인상 깊게 느꼈던 말로부터 연유되는 것입니다. 거익이 그 인상을 새롭게 하고 증가시킬 때 유익한 것입니다.”


설교는 정보전달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메시지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말한 것처럼 설교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다. 설교는 본문에서 얻은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설교는 얼마나 그가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하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설교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신학적 관점의 표현이며 복음에 대한 관점의 표현이다. 바울이 복음을 새롭게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것을 담대하게 외치는 자가 되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할 때 설교에 능력이 나타난다. 존 타울러나 존 위클리프 존 후스 등 종교개혁 이전에 개혁자들로 평가받는 이들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변했다. 존 칼빈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3년의 유배생활을 경험하면서 복음에 대한 능력을 더욱 회복하고 담대한 설교자로 변신했고, 존 낙스 역시 제네바에서의 유배생활을 통해 위대한 설교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능력 있는 설교는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가 말씀을 청중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과 바울의 가르침 그리고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죄에 대한 촉구였고, 구원받은 자의 변화된 삶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통해 죄와 세상과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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