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


2차 대각성운동의 배경


늘 그런 것처럼 대각성운동이 발흥하기 전 미국의 영적, 종교적 상황은 참혹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많은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서 얻은 결과였다. 이제 미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독립의 쟁취가 곧 낙관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미국은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그 산들은 매우 높았다. 조지 와싱톤(1732-1799)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2대 대통령 존 아담스(1735-1826)와 그 후임자 토마스 제퍼슨(1743-1826), 그리고 제 5대 대통령 존 아담스(John Quincy Adams, 1726-1848)는 삼위일체 신관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자들이었다.


청교도 신앙은 영향력을 상실하고 종교적 관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대륙의 지성인들을 양성하는 대표적인 대학 하바드 대학이 유니테리안들에게 넘어갔고, 이단 신앙을 가진 이들이 대거 양성되었다. 첫 6명의 대통령 중에 3명이 유니테리안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다.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반감과 거부감은 일반적인 상황으로 발전할 만큼 팽배했다. 7대 대통령에 오른 잭슨은 비록 장로교인이었지만“잭슨시대”라고 명명될 만큼 서민시대를 열었다.


1829년부터 1837년까지 8년간 인디언들이 동부와 남부에서 서부로 강제 이동해야 했고, 서부로의 진출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새로운 도시와 지역들이 미국에 편입되었고 신생주(states)들이 새로 출현했다. 이 시대를 전후해서 새로 태동된 주들은 인디아나주(1816), 미시시피주(1817), 알라바마주(1818), 미조리주(1821), 알칸사스주(1836), 미시간주(1837), 텍사스와 프로리다(1845), 아이오와주(1846), 위스콘신주(1848), 캘리포니아(1850), 미네소타(1858), 그리고 오레곤(1859)주를 비롯한 13개주였다. 또한 이 시대 에 서부로의 대 이동이 시작되었다.

  

외형적으로는 19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미국인의 사고와 정신을 지배한 종교는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였다. 1830년 미국을 방문한 불란서 역사학자 토크빌(Tocqueville, 1805-1859)이 자신의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언급하고, 막스 웨버(Max Weber)가 후에 재확인한 대로 당시 미국 사람 중에 교회와 관계없는 사람들은 불과 6%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주 미(美) 영국영사였던 윌리엄 우스리(William Ouseley)는 1830년 미국 총인구 12,866,020명 중에 12,136,953명이 기독교 신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의 신자는 물론 유니테리안 신자들까지 포함한 표면적인 수치에 불과했다.


이 시대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일대 도전을 맞이하게 시작했다. 첫째는 이단과 신흥종교의 발흥이다. 18세기 한 반기부터 유니테리안들이 득세하더니 19세기 초반에 이르러는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했다. 안식교와 몰몬교는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844년 10월 22일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호도하며 등장했던 밀러파 혹은 어드밴티스트들(Millerities or Adventista)은 주의 임박한 재림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다. 실제로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을 믿고 이들 집단에 합류한 이들은 이단의 미혹에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약속된 날에 주의 재림이 없었는데도 공중에 재림했다며 자신의 말을 변개하는 속임수에 또 다시 넘어간 것이다.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에 의해 설립된 몰몬교 역시 19세기 신대륙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낳은 전형적인 신흥종교였다. 천사 모로니가 알려준 금접시를 뉴욕 팔미라(Palmyra)에서 발굴하여 이 비밀을 풀어 기록했다는 몰몬경이 1830년에 출간된 후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 미혹되었다. 1844년 스미스와 그 형제들이 살해당한 후에도 유타주를 거점으로 한 몰몬교는 놀랍게 성장해 1877년에 14만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는 청교도 신앙의 변천이다. 청교도 칼빈주의 신앙이 지배하던 신대륙의 정서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현격한 변천을 맞이하였다. 1대 대통령 와싱톤부터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대 대통령들이 유니테리안이나 성공회 신자였다. 이들의 등장은 청교도 공화국을 자랑했던 신대륙에서의 종교적 변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의식을 고취시켰던 것과는 달리 유니테리안 토마스 제퍼슨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주창하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켰고 사회 정체 규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치 경제의 안녕과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외쳤다. 명문 하버드 대학이 유니테리안 신학의 온상으로 바뀌었고, 1785년 보스톤의 킹스 채플이 최초의 유니테리안 교회가 되었다.


1805년 헨리 웨어(Henry Ware, 1764-1845)가 하버드 대학의 신학부 교수가 된 다음 하버드 대학은 유니테리안 신학을 양성하는 센터로 자리 잡았다. 하버드 대학의 놀톤(Andrews Norton) 교수는 전적 타락을 조롱하였다. 유니테리안들과 일생동안 싸웠던 장로교 레인 신학교(Lane Seminary) 교장 리먼 비쳐는 유니테리안의 온상이 된 하바드 대학의 신학적 변천에 대해 이렇게 탄식했다:


“매사추세츠의 모든 학식 있는 자들은 다 유니테리안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이사들과 교수들도 모두 유니테리안이다. 돈 많고 멋부리는 지식층과 지도자들도 유니테리안 교회에 모여들고 있다. 법정에서 심판하는 판사도 유니테리안이다. ... 청교도 아버지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있다.”


셋째 자연신론의 등장이다. 불란서 계몽주의 지도자 루소, 볼테르에게서 찾을 수 있었던 자연신론 사상은 미국독립운동 당시 토마스 페인, 벤자민 프랭클린, 애단 앨런, 엘리후 팔머를 비롯한 미국 지성인들 사이에 놀랍게 파급되었다. 그 후 계몽주의 영향이 점증하면서 자연신론이 신대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면서도 창조 이후 창조 세계의 보존과 섭리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심지어 미국의 헌법에는 청교도적 정신과 자연신론 사상이 동시에 나타날 만큼 그 영향이 컸다. 

 

19세기 전반에 나타난 자유주의적인 계몽주의 영향, 서부로의 대 이동, 잭슨의 낙관주의 세계관, 이단과 신흥종교의 등장, 청교도 신앙의 쇠퇴로 미국 기독교는 전에 없는 일대 도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 영적각성의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그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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