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각성운동의 발흥과 전개


청교도 정신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청교도 정신은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주된 정신적 지주였다.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 목사의 생애”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침례교 회중교회 장로교 감리교인들에게 널리 애독되었고, 18세기 청교도 작품들이 앤도버를 비롯한 19세기 신학교 교재로도 널리 애용되었다. 시대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정신이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수많은 청교도 정신을 계승한 선교 단체들이 이 시대 태동되었다.


1810년과 1826년에 각각 설립된 미국의 해외선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Boston)와 미국내지선교회(The 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New York), 1815년에 설립된 미국교육협회(The American Education Society, Boston), 1825년에 설립된 미국문서선교회(The American Track Society, New York), 1829년에 설립된 미국 주일학교연합회(Sunday School of Union, Philadelphia)는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리차드 버드살(Richard D. Birdshall)이 지적한 것처럼 영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기독교의 대 사회문화적 책임을 구현하기 위해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이들 단체들은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남겨준 중요한 청교도적 유산들이었다. 분명히 18세기의 청교도 정신이 19세기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종교적 상황은 칼빈주의가 지배했던 18세기와 완연히 달랐다. 인간의 전적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약화되고 낙관주의적 인간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독립이후 전개된 신앙의 변천은 2차 대각성운동의 흐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버드 대학 총장 조셉 윌라드(Joseph Willard, 1781-1804)와 예일대학 총장 에즈라 스타일즈(Ezra Stiles, 1778-1795)로 대변되는 구파(Old Divinity or Old Lights)가 주도한 부흥운동이고, 둘째는 디모데 드와이트, 조셉 벨라미, 사무엘 홉킨스, 나다나엘 윌리엄 테일러, 조나단 에드워즈 2세, 나다나엘 에몬즈, 리먼 비처를 비롯한 신파(New Lights) 신학자들이 주도한 부흥운동이고, 셋째는 신학적으로는 신파 신학에 서 있으면서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찰스 피니와 같은 인물이 주도한 부흥운동이었다. 첫 번째 그룹인 구파는 대체로 칼빈주의와 에드워즈의 신학을 계승하였고, 둘째 그룹의 경우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계승한다고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그 신학 전통에서 상당히 벗어났다. 이들은 부흥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설교와 목회 사역을 통한 교회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원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때문이라며 칼빈주의 전적 타락을 부정한 조셉 벨라미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약화되고 낙관주의적 인간론이 강하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그룹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에드워즈의 부흥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떤 특정한 조건만 갖추면 부흥운동은 언제든지 발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회중교회를 초월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했고, 필요하다면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 미국의 2차대각성운동의 발흥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의 설교를 통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에 일기 시작한 일대 변혁, 자연신론의 등장, 유니테리안 주의자들의 득세, 청교도주의의 쇠퇴를 목도한 의식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 민족적 각성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종교적 변천 속에서도 영적각성의 토대는 사회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은 제임스 맥그리디(James McGredy, 1758-1817)였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으로 켄터키에서 목회하고 있던 맥그레디는 세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수백 명의 회중을 데리고 레드 리버(Red River)로 갔다. 3명의 장로교 목사들과 1명의 감리교 목사, John McGee를 동반한 세례식은 3일간에 걸친 설교와 성례가 어우러진 일종의 사경회였다. 사경회 마지막 날 맥기기 청중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자 그곳 청중들이 회개와 눈물을 흘리면서 영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인물을 동원하셔서 영적각성운동의 포문을 여신 것이다. 그곳에 참석한 이들은 성령께서 자신들 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경험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800년 7월 개스퍼 강(Gasper River)에서 열린 야영 집회(Camp Meeting)에서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100마일이 떨어진 먼 곳에서 모여온 수많은 사람들이 3일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그 가운데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장로교 목사 윌리엄 맥기(William McGee)가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자 청중들은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 후 1803년 맥그레디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뉴욕 미션너리 매거진(New York Missionary Magazine)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회중을 흔드는 듯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괴로운 심령들의 통회소리가 거의 그의 설교만큼이나 커졌다. 집회가 끝난 후 엄숙함이 점증하기 시작하더니 곧 청중들 절대 다수가 가장 엄숙한 분위기에 사로잡힌 듯했다. 참석한 자들 중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은 듯했고 그동안 굶주리고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것이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가장 광대한 관심은 영원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 영적각성과 회심의 역사가 수많은 곳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이상하고 놀라운 몇 가지 새로운 일들이 내[맥그레디]게 일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전형적인 영적각성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철저한 회개가 이들 가운데 나타났고 그것도 그곳에 참석한 전 회중들이 그것을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장엄함이 회중들을 압도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고 굶주림과 취침도 잊은 채 영원한 것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영적각성운동이 여러 곳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영적각성운동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801년 9월 20일 테네시 주 부흥집회에 참석했던 평신도 존 핀리(John Finley)는 자신의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엄청난 사람들이 지난 주 금요일부터 현재(목요일)까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테네시주 주지사가 그 현장에 참석하여 격려할 만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테네시주와 인근 오하이오 주에서 무려 2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만큼 그 열기는 대단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긍정하며 인간 안에 있는 죄성과 죄의 결과를 밝히며 회개를 촉구하였을 때 성령께서 심령들 가운데 놀랍게 역사하셨던 것이다.


서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동부에서도 영적각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동부의 영적각성은 커넥티컷에서 시작되었다. 구파나 신파를 막론하고 동부에서 사역하고 있던 목회자들은“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각성시킨다”(God is awakening his people)는 모토아래 교파를 초월하여 선교, 부흥, 출판을 통해 영적각성을 위해 커넥티컷 선교회(The Missionary Society of Connecticut, 1798)를 결성했다. 커넉티컷 복음주의 매거진을 1801년에 창간하고 자신들이 전개하는 운동의 역사를 하나로 묶었다. 1798년에 결성되고 20여명의 목회자들이 여기에 동참했고 실제로 얼마 후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의 결성은 참으로 시의 적절했다. 신흥도시마다 정통회중교회를 반드시 하나 둘씩 설립하고 각 가정에 성경을 지참하도록 법률로 정할만큼 기독교적 색채가 강했던 커넥티컷 주가 점차 영적인 영역에서 손을 떼기 시작할 무렵에 선교회가 발족된 것이다.


커넥티컷에서의 영적각성의 포문은 1797년 2월 서머즈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던 찰스 박커스(Charls Backus)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1740년 이후 거의 50년간 영적침체를 달리던 동부지역에서 처음으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비차드 버드셀이 기술한대로 “그 각성운동은 젊은이와 함께 시작되었다. ...각성된 자의 과반수이상이 35세 이하 사람들이었다. 고함 소리나 울부짖음이 한건도 없이 진행되었다. 모두 경건 엄숙했고 ...성경의 교리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처럼 젊은이들이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젊은이들은 부유하고 안정된 자들이었다. 커넥티컷의 토링포드에서 사역하는 사무엘 밀즈(Samuel Mills) 역시 젊은이들이 가장 민감하게 복음에 반응했음을 증언한다.


“젊은 층 가운데 놀라운 종교심이 들어나고 있다. 그들은 매주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에 영적 관심을 확산시키고 있다. ... 특별한 경건과 엄숙히 사람들의 심령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말씀과 복음에 반발했었음을 발견했고 이제 하나님의 능력 이외에는 자신들의 완악성을 치유 받을 수 없다고 깨닫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화해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항복했고 사심 없는 헌신을 다짐했다.”


부흥운동 기간 동안 놀라운 영적각성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변화는 죄에 대한 두려움, 철저한 회개, 하나님의 주권 수용, 새로운 헌신이었다.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의 주권은 부흥운동에서 늘 병행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긍정하고 창조주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경험할 때 부흥이 가능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낙관론적인 인간론 속에서 부흥은 경험될 수 없었다.


뉴햄프셔의 의사 모릴(David Morill)은 칼빈주의 부흥운동을 경험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비 기독교인이라고 조롱하는 것에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기도하다 1797년 7월 29일 놀라운 영적각성을 경험한 것이다.


“1779년 7월 27일 ... 나는 잠을 못이루고 몇 번이나 깨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나는 이 밤에 나의 슬픈 고뇌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속성과 경영방침에 대항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도 없다. 

...[다음날 아침] 나는 울며 기도했다. 그리스도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어떠한 위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추한자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살면서 죄만 지어왔기 때문이다. [13일간의 악몽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지난 후] 나의 영혼은 자유와 안식을 누렸다. 나는 주님을 만난 너무나 큰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이제 칼빈주의 교리를 기쁘게 영접하게 되었다. 성경과 건전한 이성에 합치되기 때문이다. <나는 위안과 유익을 얻는 가운데 홉킨스 박사의 신학저술을 읽고 있다.>

 

모릴의 솔직한 고백은 당시 영적각성의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모종의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자신의 타락한 본성, 자신의 무능함, 그리고 거룩하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전에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일종의 준비 기간을 거쳤음을 발견한다. 무려 13일간 데이비드 모릴은 너무도 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마치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 선 죄인처럼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2차 대각성운동 때에서도 칼빈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상당수의 회심의 역사가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외치는 설교자들을 통해 나타났다. 1차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부패와 타락을 강단에서 외칠 때 청중들 가운데 회개와 통회 가운데 참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2차 대각성운동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커넥티컷 주변의 버몬트 주 부룩필드에서 사역하던 엘리야 리먼(Elijah Lyman)은 1년이 넘게 청교도 칼빈주의 핵심 교리를 설교했다. 얼마 후 그들 가운데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경험했다. 리먼 목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복음의 교리를 설교하였다. 원죄, 인간의 심령의 전적부패, 하나님의 주권 등등을 말했다. ...회개하지 않은 자의 책임과 완악성, 내세에서의 죄인들의 심판도 이야기했다.” 청교도들이 외쳤던 원색적인 복음을 1년이 넘게 외친 결과 1801년 3월 집회소에서 열린 사경회 때 그곳에 참석한 남녀가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2차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단서를 모릴의 증언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정통 칼빈주의를 수정한 “수정 칼빈주의” 신학서적들이 널리 애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릴이 위로를 얻었다는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원죄(original sin)를 부인하고 자범죄(actual sin)만 인정한 신학자였다. 이처럼 많은 회심자들 가운데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후 신앙의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칼빈주의가 수정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영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원죄는 거부하였다. 인간의 죄와 대속을 인정하면서도 아담의 원죄가 후손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예정론도 수정을 맞이하였다. 인간의 부패성과 죄성을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외쳤지만 인간의 원죄를 거부함으로써 전적 타락교리가 일대 수정을 맞은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관점이 수정되고 인간의 책임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리먼 비처, 나다나엘 테일러, 디모디 드와이트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에드워즈의 칼빈주의를 수정한 수정 칼빈주의를 통해 부흥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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