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피니와 2차 대각성운동


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찰스 피니(1792-1876)였다. 그는 2차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 가장 활발하게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 받은 인물이었다.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그만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1792년 8월 29일 농부의 아들로 출생한 찰스 피니는 1821년 29세 때 뉴욕 아담스에 있는 벤자민 라이트(Benjamin Wright) 변호사 사무소에서 실습훈련을 받던 중 회심을 경험하고 부흥사로 등장하였다. 1818년부터 사무소에서 일하던 피니는 3년 후인 1821년 10월 10일 화요일 마을 북쪽에 위치한 숲 속에 들어가 정오를 넘길 때까지 기도하던 중 그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적인 환희”를 경험했다. 그날 퇴근 후 그곳을 다시 찾은 피니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했는데 그는 이것이“환상이 아니라 육체적[실재적] 현시였다”고 믿었다.


“나는 강한 성령세례를 받았다. ...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한테서도 그런 일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는데, 정말 순간적으로 전혀 뜻 밖에 성령께서 나의 온 영혼과 몸을 관통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내게 임하셨다.”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한 피니는 바니 집사가 자신의 소송재판이 오늘 아침 10시인 것을 기억하느냐고 묻자“바니 집사님,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을 맡았으므로 귀하의 소송을 맡을 수 없습니다.”며 거절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피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성의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학교를 거절했다고 기록하지만 앤도버, 프린스톤, 어번 신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모두 거절당했다. 신학교에서의 훈련이 거부당하자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인 게일 밑에서 목회후보생으로 실습을 시작하여 1823년 12월 30일 세인트 로렌스 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얻고 1824년에 전도목사로 임직을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24년 3월 17일 제퍼슨 상부 지역 여성선교회의 부탁을 받고 뉴욕 서부지역 재퍼슨 에반즈 밀즈 촌락의 작은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피니의 열정적인 설교는 그곳 시골교회 교인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학교나 교회 혹은 회심한 저명인사의 집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다. 에반스 밀스로부터 21킬로 떨어진 엔트웝(Antwerp) 근처 교회가 없는 곳에서 열린 집회에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한번도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는 그 마을에서 피니의 설교로 회중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밑으로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다. 피니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동그라지더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울었다. 설사 양손에 검을 가지고 그들을 친다 해도 그들이 나동그라지는 것만큼 그렇게 빨리 넘어뜨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거의 온 회중이 무릎을 꿇고 있거나 엎드려 있었습니다.”사람들이 소리 높여 부르짖는 소리에 피니의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날 집회는 밤중 내내 계속되었고 다음날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1824년 10월 5일 게일이 담임하는 교회의 신실한 자매 리디아 루트 앤드류(Lydia Root Andrews)와 결혼한 피니는 서부일대에 부흥회를 인도하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피니의 부흥의 불길은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퍼치 강(Perch River), 브라운스빌(Brownsville), 래이빌(Rayville), 구버넬(Gouverneur) 지역으로 계속 이어졌다.

  

1825년 8월 피니가 인도한 뉴욕 주 중부 오나이다 카운티 웨스턴에서의 집회, 이어 열린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회개의 역사가 너무도 강하게 나타나 회중들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특히 뉴욕 중부에 있는 로마에서 열린 어느 저녁 예배 시간에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다. 20일간의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매일 밤 피니는 그날 회심한 사람들을 강대상 앞으로 나와 서게 하는 초대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은 누가 회심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는지 실제로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회에서 쓰러지는가 하면 나중에 자신의 집에 돌아가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로마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로마는 성령의 임재로 가득한 도시로 변했다. 우티카의 한 보안관은 공무차 로마를 향하다 도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더 강해졌고 공공건물이나 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압도된 나머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우티카로 돌아오자마자 그 보안관은 회심했다.

   

부흥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 회심을 경험한 보안관이 우티카의 어느 호텔에 묵고 있을 때 호텔 주인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고, 곧 주인과 가족이 회심을 경험했다. 우티카에서 가장 큰 이 호텔에 하룻밤을 묵고 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강하게 의식하고 도시를 떠나기 전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로우빌에 사는 한 상인이 업무차 우티카에 왔다 이 호텔에 묵게 되었다. 주님을 영접한 그는 업무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고, 곧 로우빌에서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했다.


피니를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주변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1826년 여름 어번에서 열린 집회, 그해 가을 뉴욕 주 트로이에서 열린 집회, 이어 열린 뉴레바논 집회에서 주의 영이 놀랍게 임했다. 특히 레바논에서의 집회 때“주의 영이 쏟아져 내렸으며 곧 굉장한 능력이 수반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피니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강한 회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스티븐타운(Stephentown)에서 열린 부흥회 때 피니의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아주 유력하고 힘센 사람들이 나가 떨어지거나 자기 자리에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무려 150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피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인도한 부흥회에 나타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을 열거했다. 능력 있는 기도의 영이 강하게 나타났고,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달았으며, 사람들이 갑자기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회심한 자들에게 굉장한 사랑과 기쁨이 충만했으며, 회심자들이 바른 정신을 가지고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이들이 매우 진실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였다.    


1828년부터 1년간 피니는 장로교 전통이 강한 필라델피아에 머물면서 부흥의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그해 봄 필라델피아의 부흥의 불길은 델라웨어 강과 북부 펜실바니아주로 확산되었다. 1830년 피니는 리딩, 랭커스터, 콜롬비아를 거쳐 다시 뉴욕시로 향했다. 1830년 9월부터 1831년 3월까지 뉴욕 중부 로체스터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도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라 그가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 로체스터에서 사역하는 동안 피니는 처음으로 예배석 앞부분에“구도자석”(Anxious Seat)을 만들어 놓고 예배가 끝난 후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로 와서 기도를 받거나 상담을 받도록 유도했다. 피니가 닿은 곳마다 그 도시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 지역의 복음화와 부흥을 위해 특별히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 지역의 불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기도의 짐을 지워주셨던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피니를 통해 응답을 받았다. 로체스터에서의 부흥의 불길은 주변 도시들로 확산되며 놀랍게 번져 나갔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즉각적인 효력을 발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사람들의 회심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말씀만 제시하면 되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곤 했다. 당시 로체스터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가 워낙컸기 때문에 뉴욕 주와 뉴잉글랜드 전역 및 다른 많은 지역에 있는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것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미국 전역에 전례 없이 큰 부흥운동을 일으키신 것이다.”


부흥의 영향으로 로체스터에는 인구가 3배로 증가한 반면 범죄율은 삼분의 일로 줄었으며, 악의 요람이었던 극장이 문을 닫았고 다시 극장이 세워지기까지 7년이 걸려야 했다. 부흥운동 시기에 회심한 자들이 그 도시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831년 부흥의 불길은 로체스터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피니의 부흥의 불길은 피니가 가는 곳마다 어번, 뉴욕 버팔로,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보스톤, 뉴욕으로 이어졌다. 1832년 5월 극장을 개조하여 만든 뉴욕의 채텀 가든 극장교회를 맡아 사역하던 피니는 한편으로 건강의 악화와 다른 한편으로 부흥운동에 대한 반대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채텀 극장교회를 담임하다 콜레라에 걸린 피니는 1834년 1월부터 7월까지 지중해 연안으로 휴양을 떠났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뉴욕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보니 3,4천명이 모이던 교회가 겨우 2,3백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 보다 힘든 것은 부흥회 방식을 놓고 일기 시작한 자신에 대한 반대였다.

  

이미 뉴욕에서 사역하던 1827년 7월 18일 뉴욕 주의 뉴 레바논에서 피니의 “신부흥운동방식”(New Measures Revivalism)을 놓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리먼 비쳐, 아사헬 내틀톤 등이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이때 피니의 부흥방식을 반대하는 이들이 피니가 시행하는 공 예배 때 여성들을 기도시키는 일, 기도회 중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기도를 시키는 일, 소리를 높여 기도를 하는 일이 문제로 거론되었으나 어렵지 않게 넘어갔다. 열거된 논제들이 피니의 부흥운동을 저지할 만큼 문제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파 내에서 피니의 부흥방식을 놓고 문제가 제기된 것은 그들 가운데 피니의 부흥운동 방식을 탐탁치않게 생각한 이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피니는 이런 저런 문제로 결국 1836년 3월 13일 노회를 사임하고 회중교회로 적을 옮긴다. 이 일 후 곧 뉴욕 브로드웨이 성전을 맡기 시작한 피니는 4월부터 11월까지는 교회를 돌보다 12월부터 3월까지 오벌린에 와서 교수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다.

 

지나친 사역, 아내의 소천, 건강의 약화로 피니의 사역은 1848년까지 침체의 시기를 맞았다. 그러다 1849년 9월 갓 재혼한 아내와 함께 잉글랜드로 떠난 피니는 9개월 간 조지 휘필드가 사역했던 런던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영국 국교 목회자 몇 사람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이때만큼 피니가 런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내가 런던만큼 그렇게 많이 기도해준 곳도 없다. 때로 내가 기도할 때, 특히 앞에 있는 수많은 회중들과 함께 공중 기도를 할 때면 나는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기도의 영이 나 대신 내 안에서 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크게는 그 도시 전체를 위해 간절히 간구하곤 했다.”

  

피니는 회개의 증거로 죄의 고백과 변상을 강조했다. 때문에 그의 집회 때는 온갖 죄악들이 고백되었고 변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준 변상액이 상당액에 달했다. 피니는 참된 회개라면 거기에는 죄의 고백과 변상이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1850년부터 187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피니의 마지막 생애 동안 특이할만한 부흥운동은 1852년 하트포드에서, 1855년 로체스터에서, 그리고 1858년 보스톤에서 일어난 부흥이었다. 런던에서의 사역, 이어 가진 프랑스에서의 요양 후 뉴욕에 돌아왔으나 자신이 맡았던 교회는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 새로 부임한 부목사가 부흥운동에 아주 비협조적이어서 피니는 1852년 1월 1일부터 하트포드로 옮겨 사역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사역을 통해 기도의 영이 놀랍게 확산되었고, 죄에 대한 고백이 나타났으며, 처음 냉소적이던 장로교인들도 그의 부흥집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기가 높아졌다. 1855년 가을, 로체스터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곳에 간 피니는 그곳 변호사와 검사들 판사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다. 이들이 피니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받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까지 은혜를 받았다. 은행이나 상점, 버스 안이나 거리 등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온통 피니가 인도한 부흥회에 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이 지역 대학생들을 위한 특별기도와 금식기도의 날이 1856년 2월 28일 선포되었고, 이때 로체스터 전체 학생의 85%가 회심하는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피니를 부흥운동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그를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그를 통해 놀랍게 일어난 과연 참된 부흥운동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진위여부가 아닐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고, 그를 통해 가는 곳마다 놀랍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가 부흥운동을 사회개혁과 연관시켜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하고 기독교의 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피니의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가 자신을 도구로 하여 발흥하고 있는 부흥운동을 잘못해석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부흥운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믿지 않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일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자신이 놀랍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적인 해석을 가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가 바로 여기 있다. 1730년부터 1830년경까지 지배하던 부흥운동의 견해 곧,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는 찰스 피니가 등장하면서 일대 수정을 맞았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그것이 발흥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던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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