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리디스 부흥 이야기 5 -던컨 캠벨

    

                                                 -이 스데반

 
   Revival was there before I ever set foot on the island. (Duncan Campbell) 내가 그 섬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에 이미 부흥이 있었다. (던컨 캠벨)

 


     직접 들은 이야기 
   주일에 교회를 가서 우연히 한 청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죤 케네디(John Kennedy)라는 친구인데, 루이스 섬의 스토노웨이(Stornoway)출신이었다. 루이스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섬 전체는 2 만명 정도 되고, 스토노웨이에는 8천명 정도가 산다고 한다. 그의 모친은 다름 아닌 발바스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부흥의 물결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부친과 여동생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죤은 루이스 부흥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그런 부흥이 있었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회심한 때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기도하면서 구원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방은 2층에 있었고, 부모님의 방은 아래층에 있었는데, 매일 밤마다 방에서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기도를 하면, 아래층에 소리가 들려서 어머니가 얘야 너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시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그저 같은 기도인데, 자연스럽게 그냥 밤마다 그렇게 기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은 상당히 보수적이라고 한다. 주일이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교회로 모여 예배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 섬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안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배나 비행기편도 주일에는 운항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 들어서 비행기는 주일에 운행한다고 한다. 일부 가게도 조금씩 주일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흥이 일어난 땅이고 성령님이 직접 운행하시던 땅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땅인 것이 틀림없다. 21세기에 이런 땅을 찾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리라. 또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고등학교 정도 되는 학교의 학생들 50 여명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전체 인구가 2 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다만 대학시설이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에 청년들은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 혹은 가장 큰 도시인 글라스고로 학업을 위해 나오는 경우가 많고, 섬에 직장이 별로 없어서, 섬으로 영구 귀향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고 한다. 5장에서는 던컨 캠벨이라는 인물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려고 한다. 그 전에 맥케이 목사님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할 것이다. 던컨 캠벨 목사님을 서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1949-1953년 헤브리디스 부흥 당시 섬 일대를 순회하면서 말씀을 증거하고, 부흥의 역사들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멕케이 목사
   두 노인의 권유로 교회 리더들과 함께 오두막 기도를 시작했던 맥케이 목사님에 대해서 약간 언급한다. 2차 세계대전 후에 게일족 출신의 목회자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본토에서 게일어를 할 수 있는 목사님들이 초청되어 섬으로 가서 일정기간 사역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맥케이 목사님은 Church of Scotland 소속으로 당시 발바스에 목회자가 없었던 관계로 1949년 발바스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현지 기독교인들이 뜨겁게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 역시 헤브리디스 섬 중 하나인 우이그 (Uig) 에서 1949년 이전에 일어났던 부흥을 경험한 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성령의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하였다. 그는 몇 달 간의 대리목사 자격으로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임 목사로 발령을 받았고, 복음의 진리와 부흥에 대한 마음을 가진 사랑 받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1949년 12월에 본격 시동이 걸린 루이스 부흥이 시작되기 불과 몇 달 전에 도착하여, 현지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며 부흥을 사모하였고, 그 결과로 그 상징적인 오두막 기도를 통하여 1949년 부흥의 첫 시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인도해 나갈 새로운 인물이 섬으로 올 수 있도록 본토의 목회자를 섭외하게 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던컨 캠벨 목사님이 초청되어져 오게 된다. 원래 섭외하였던 목사님은 자신이 갈 수 없다면서 대신 던컨 캠벨 목사님을 추천하게 된다.

   캠밸 목사님 또한 여러 집회등으로 분주한 가운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전 집회 일정을 별안간 취소하고, 순종하여 발바스로 오게 된다. 맥케이 목사님은 부흥의 시작과 그 종료시점인 1954년까지 루이스 섬일대의 부흥 현장을 캠벨 목사님과 함께 혹은 독자적으로 목격하고 말씀을 증거하였다.


    던컨 캠벨
   던컨은 1898년 2월 13일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지역의 Ardchattan 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드라미틱한 경험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모는 기도로 깊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 이었다. 그는 세계대전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Faith Mission 이라는 선교기관에서 1년 과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복음전도자로서의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주로 서쪽 섬 일대를 순회하며 사역하는 일이었다.

   Faith Mission 을 나와서 잠시 지역교회의 목회 사역도 하였고, 그러던 중 1940년에 Falkirk 에 있는 United Free Church 의 부름을 받고, 1942년 그가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으나, 그의 수년간의 상당한 목회 사역의 결실의 결과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는 주목 받는 목회사역을 하다가 사임하고 1949년 1월에 1일에 Faith Mission 에 다시 합류하여, 스카이 (Skye) 섬 일대에서 복음전도 사역에 매진하게 된다. 당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Faith Mission 이 에딘버러에 제공한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에딘버러에서 스카이 섬까지 약 200 km 거리를 다녔다고 한다. 스카이 섬은 본토와 보다 인접하게 위치한 섬으로 루이스 섬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그는 1949년 12월에 우여곡절 끝에 발바스에 도착하여 초청설교를 시작하면서, 루이스 부흥기간 동안에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부흥의 시기가 가라앉은 1958년에 에딘버러에 소재한 Faith Mission 의 성경학교 학장으로 부름 받고, 다년간 일했으며, 은퇴 후에는 순회 설교가로서 영국일대와 전 세계를 다니며 설교하였다. 그리고 1973년 스위스 로잔(Lausanne)의 YWAM 소속의 학교(School of Evangelism)에서 방문강사로서 가르치던 기간에 하나님 곁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이 스위스 로잔 베이스는, 던컨이 1969년 미국 일리노이스에서 열린 한 성경 컨퍼런스에서 당시 젊은 로렌 커닝햄을 만나면서, 그가 다문화적인 성경학교를 스위스에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듣고, 서로 연락하던 중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건물을 매입하면서 시작된 학교이다. 던컨은 이 성경학교에서 복음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가르쳤으며, 직원들과 학생들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강사로 활동했다.

   그의 일대기를 접하면서 내가 가지는 느낌은 그는 말씀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때에 민감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복음사역과 목회사역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이었음이 느껴진다. 비바람 많은 스코틀랜드를 생각해 보라. 비바람을 철철 맞아가며,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섬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모습... 그는 그의 생전의 설교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 것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은 결코 헤브리디스에 부흥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며, 자신이 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부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다른 한가지는 부흥은 어떤 복음사역이나 사람에 의해 조직된 어떤 운동이나 특별한 노력과는 차원이 다르며,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며, 그 후 급격하게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또한 강조한다. 그는 헤브리디스 지역의 사역을 포함한 여러 사역의 현장에서 다양한 영적인 현상들을 여러 번 직접 경험하였지만 (천상의 음악을 들음, 기도하던 집이 진동함, 등등) 성도들과 학생들이 현상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고, 어떠한 현상을 추구하려 하는 자세를 결코 지지 하거나 권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현상에 치중하기 시작할 때, 사탄이 이러한 현상을 쉽게 도구로 사용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전략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균형잡혀 있으면서도 열린 자세를 견지하였고, 성령님께 철저하게 사로잡힘으로 철저하게 복음에 충실하였던, 탁월하면서도 특징적으로 쓰임받았던 던컨 캠벨. 헤브리디스 부흥만큼이나 그의 활동과 생애에 대해서도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이 애석하다.

  • 기자명 이 스데반
  • 입력 2009.04.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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