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부 타밀나드 부흥운동


인도북부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1905년 마드라스 시 성공회시온교회(Zion Anglican Church)에 부흥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교회 인도인 담임목사가 “나는 지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새로운 영적 체험을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부흥운동이 이 지역을 강타하고 있었다. 코임바토르(Coimbatore)에서는 주일 아침 기독교 형제단이 성찬식을 거행할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재 하셨다. 죄에 대한 고백, 철저한 회개, 죄 용서의 기쁨과 화해가 어우러진 놀라운 영적각성이 회중들 가운데 나타났다.


주일 오전에 시작한 집회가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고, 다시 저녁에 열린 집회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그 현장에 있던 형제단 선교사 핸들리 버드(Handley Bird)는 “하나님께서 코임바토르에 임하셨으며 우리는 마치 꿈꾸는 자들 같았다”고 증언했다. 자신의 죄와 형제의 죄를 놓고 통곡하는 그 소리는 마치 곡성과 같았고,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에 대한 경험으로 찬양과 감사가 회중들 가운데 가득찼다. 스쿠더(Ida Scudder)가 인도하는 개혁교회(Reformed Mission), 치투르(Chitoor)의 감리교인들, 콜라르 골드필드(Kolar Goldfields)에 있는 타밀교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으며, 1906년 10월 22일에는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이 시무하는 타밀의 도나버(Dohnavur)에서도 주일오전예배가 끝날 때 쯤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였다. 에이미가 말과 기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임재가 강력했다. 이날 성령의 역사의 포문을 연 사람은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주일학교 상급반 학생 중 한명이 기도하려다 울며 통회하자 곧 다른 학생들이 울기 시작했고, 곧 회중 전체가 통회하기 시작했다. 이어 순식간에 온 회중이 성령의 임재 앞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현장에 있던 에이미 카마이클은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그것은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 말 외에 달리 할말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순식간에 교회 2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어린 소녀, 소년, 어른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마룻바닥에 엎드리더니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만 찾으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파도 소리나 나무에서 나는 강한 바람 소리와도 같았다.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누가 내는 소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물론 저 북부 인도에서는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타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 타밀 사람들은 워낙 신경이 둔하고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다.”


철저한 회개와 죄에 대한 고백이 타밀 지역에 강하게 나타났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완전히 회심한 것이다. 에이미 카마이클이 증언한 것처럼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어린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신학교 학생들이 영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했고, 젊은이들이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아갔다. 존 존스(John P. Jones)의 말대로 인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인도인들의 그와 같은 영적각성을 직접 목도한 후 인도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인도 영적각성을 목도하고는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전에 어떤 다른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때 인도 사람들만큼 그렇게 깊은 죄의식 아래 몸부림치며 애통해 하는 장면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느 부흥운동이 그렇듯이 인도 부흥운동에서도 극단적인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흥운동이 한창 코임바토르 지역에 일어날 때 형제단의 어느 다른 교회에서는 한 소녀가 입신하여 주님께서 그녀를 통해 일인칭으로 직접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증언한 것처럼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 사탄이 틈타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으로 특별계시가 종결되었고, 또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계시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의 원리이다. 한국의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이 일 때 주님이 일인칭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했던 소위 원산 접신녀들이 보여주듯 신비주의 부흥운동은 자칫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와 같은 극단적인 현상은 이 시대의 인도나 웨일즈나 한국의 부흥운동의 일반적 특징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24 11:06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