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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재편된 백만인 구령운동
2009년 07월 08일 (수) 13:27:29 평양대부흥

  새롭게 재편된 백만인 구령운동

 

 
   
    1910년대 전주 시가의 전경/ 출처: www.hani.co.kr

   1910년 8월 22일 치욕적인 한일 합방조약이 체결된 뒤 “대한” 대신 “조선”을 사용해야 했고, 영어 명칭도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코리아(Korea) 대신 조선(Chosen)으로 바뀌었다. 1911년에 들어서면서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선교사들마저 코리아 대신 조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주권이 그토록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이 민족의 소망으로 점점 부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기독교로 귀의하고, 과거 민족의 중흥을 일선에서 꾀하던 기독교 정치 지도자들도 선교 현장에서 인재를 양성하거나 민족복음화를 달성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복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너무도 놀라웠다. 1910년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서 한 선교사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복음 전파”라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한국에서의 복음의 상황 가운데 가장 저항할 수 없는 특징은 모든 신선한 노력에 대한 놀라운 반응이다. 그런 상황은 복음 전파의 긴박성을 말해 준다. 현재는 전국의 모든 상황이 이 나라의 신속한 복음 전파를 촉진하기 위해 연합하는, 한국 백성의 역사에서 좀체 찾아보기 드문 시기이다. 한국은 아마도 오늘날 비기독교 국가 중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선교지일 것이다. 신앙, 풍습, 관습을 동반하는 옛 문명은 완전히 지리멸렬해졌고, 새로운 한국이 우리 눈에서 발흥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역하거나 한국을 방문한 외부 인사들은 하나같이 지금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만큼 이 민족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 없으며, 이것을 대신할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 같은 상황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현 세대(世代)내에 이 민족을 완전히 복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현 기회를 이용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급성장하는 한국 교회를 퇴보시키고 물질주의, 합리주의, 그리고 회의주의의 세력에 길을 내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의 복음 전파는 시급한 시대적 과제이자 사명이 아닐 수 없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의 거의 전 인구는 지금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그들이 대량으로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해 기독교로 돌아서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선교사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와 교육의 진보와의 접촉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미신숭배사상을 일소시켜 주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회유적이고, 몇몇의 경우 기독교운동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1910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전도 집회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고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권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이 민족이 보여 준 복음에 대한 반응은 암흑 가운데 빛나는 샛별과 같았다. 1910년 가을, 한일합방의 쓰라린 고통을 제일 먼저 피부로 접한 서울 지역의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다지는 일이었다.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서울에서 대대적인 전도 집회를 열기 위해 언더우드, 노블, 게일, 저딘, 하디 등 지금까지 부흥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제로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받고 있던 선교사들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 외에 길렛, 로톤(B. L. Lawton), 휴 밀러, 벙커, 하가드(Hoggard), 아비슨, 커티스 등 지도급 선교사들이 대거 동참했다.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1910년 대규모 서울 전도 집회를 열기로 결정한 이면에는 이유가 있었다. 1909년 장감연합공회에서 1년 동안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실제로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서울의 그리스도인들이 대규모 전도 집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더 많은 기도를 하기로 동의하고 지난해 가을의 계획을 일단 제쳐두기로 했었다. 그러나 봄이 왔을 때 개교회가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력을 총동원하기가 쉽지 않아 서울의 사역자들과 목회자들이 봄 대신 여름에 전도 집회를 열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막상 여름은 우기인데다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없어 10월에 전도 집회를 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최종적인 견해가 나왔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의장에, 길렛이 부의장에, 서기에는 로톤이, 그리고 재정에는 휴 밀러가 선출되었다. 서울 전도 집회는 처음 계획과는 달리 상당히 확대된 것이었다. 전도 집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민족복음화운동에 주저하지 않고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처음에는 몇몇 뜻 있는 선교사들 차원에서 소규모로 추진하려던 전도 집회가 전국적인 전도 집회로 확대되었다. 장로교는 전국에 한 달 동안 사역을 추진하기로 하였고, 지방 각 선교 지역 출신 몇몇 한국의 지도적인 사역자들이 서울의 사역자들과 함께 매일 모임을 갖고 전도 집회를 계획하고 준비 기도회를 가졌다. 그들은 10월 서울에서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고, 그 후 전도 집회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백만인 구령운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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