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26세 총각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젊은이답게 선교 열정이 충만해 있었으며 다른 선교사에 비해서 한국어도 빨리 배웠다. 하지만 총각인 그에게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결혼이었다. 마침 그때 한 여성이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 이름은 릴리어스 홀턴이었다. 홀턴은 의사가 되어 선교지에 가려고 작정하고 30세의 늦은 나이에 의과대학에 입학해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다. 원래 수술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되었지만 선교를 위해서 참았다.


홀턴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888년 봄 36세의 나이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곧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병원에서 일했다. 이런 가운데 언더우드와 홀턴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홀턴은 언더우드보다 8세나 많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홀턴은 모든 꽃 중에서 순백색의 인동 덩굴꽃을 가장 좋아했는데 언더우드는 그것을 알고 그 꽃을 홀턴의 집에 전달하곤 했다. 두 사람은 1889년 3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다음날 언더우드와 홀턴은 9주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압록강 내륙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지만 어떤 선교사도 그곳을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 부부가 그곳을 방문하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이것은 달콤한 신혼여행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전도여행이었다.


언더우드는 신혼여행 동안 한문 전도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당시 조선은 국법으로 전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어떤 법도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더우드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홀턴은 환자를 치료해주었다. 그 숫자가 600명이 넘었다. 이 신혼부부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그들이 잠을 자려고 하면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창호지에 침을 바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홀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좀 쉬려고 해도 창문 구멍마다 우리를 쳐다보는 눈이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인가?”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부부는 복음을 위해서 신혼여행까지도 전도의 기회로 사용한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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